2024년 11월 23일 토요일  
로동신문
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우리 가정수첩》과 함께 흘러온 헌신의 스물여섯해
상원군상업관리소 로동자 서영주동무에 대한 이야기

2023.3.18. 《로동신문》 4면



상원군 룡굴상점은 읍에서 30리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잡고있었다.

상점에 들어서니 보기 좋게 진렬해놓은 갖가지 상품들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매대앞에 서있던 나이지숙한 판매원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그가 바로 룡굴리사람들로부터 《우리 상점책임자》, 《리의 주부》로 친근히 불리우고있는 서영주동무였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초소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영주동무와 인사를 나누던 우리의 눈앞에 책꽂이에 주런이 꽂혀있는 《우리 가정수첩》들이 안겨왔다.그 책들속에 리안의 수백세대의 가족수와 매 사람의 생일, 직장직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여있었다.매 세대별에 따르는 주문상품과 상품공급정형이 적혀있는 《우리 가정수첩》들을 펼쳐들고 우리는 부족하고 어려운것이 많은 속에서도 리주민들의 생활을 따뜻이 돌보며 복무의 한길만을 변함없이 걸어온 서영주동무의 인생길을 조용히 더듬어보았다.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자

 

책가위에 새겨져있는 《우리 가정수첩》이라는 글줄을 쓸어보며 서영주동무는 생각깊은 어조로 말머리를 떼였다.

《이 수첩에 새겨진 우리 가정이란 글자에는 자기가 담당한 리안의 모든 가정들을 우리 집으로 여기고 자기 집 살림살이를 하는 심정으로 주민들의 생활을 돌봐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우리를 수십년전에로 이끌어갔다.

서영주동무가 룡굴상점에 온것은 지금으로부터 26년전, 나라가 모진 고난을 이겨내던 때였다.

벽체가 군데군데 떨어져 볼품없는 상점건물, 텅 비다싶이 한 매대, 그의 시야에 비낀 상점의 첫 풍경은 쓸쓸하기만 했다.

상점안을 얼추 청소하고 매대앞에 선 그는 손님들이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그러나 종일 가도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상점문을 닫으려는데 누구인가 상점안으로 들어섰다.너무도 반가왔던 나머지 서영주동무는 불시에 《어서 오십시오.》라고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벌씬벌씬 웃으며 다가온 손님은 뜻밖에도 인민군대의 어느한 구분대에서 정치일군으로 사업하고있던 그의 남편이였다.

상점매대에 처음 서보니 감흥이 어떤가고 묻는 남편에게 서영주동무는 자기가 체험한것을 그대로 터놓았다.안해의 하소연을 조용히 듣고있던 남편의 입에서 이런 말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렇다면 당신이 찾아가야지.》

남편의 말마디가 그의 가슴속에 화살처럼 들이박혔다.

다음날 서영주동무는 농장의 작업반들을 찾아다니며 농장원들을 만나보았다.농장원들은 한결같이 생활에 필요한것을 가까운 상점을 통해 구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주민세대들을 돌아보아도 똑같은 목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상점으로 돌아온 그는 상업봉사활동과 관련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교시를 학습하고 수첩의 첫장에 또박또박 적어넣었다.

상업일군들이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려면 인민들의 수요를 잘 알아야 하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애써 노력하여야 한다.

상업일군들은 인민의 참다운 주부가 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교시를 자자구구 심장에 새길수록 서영주동무는 상품이 보장될것만 바라고 손님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것은 상업일군의 참된 자세가 아니라는것을 깊이 절감하였다.

그는 《우리 가정수첩》을 만들고 주민세대들을 빠짐없이 등록한 다음 주민지대들을 돌며 그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그에 기초하여 주민들이 요구하는 상품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군상업관리소에도 찾아가고 공장, 기업소들도 돌면서 주민들이 요구하는 상품을 한가지라도 더 구입하기 위해 애썼다.

상점에 상품이 늘어나니 찾아오는 사람들도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서영주동무는 주민들의 가정을 찾아다닐 때면 계획적으로 다니군 했다.식생활에 필요한 상품과 식료품을 알기 위해 주민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찾아다녔고 바쁜 농사철에 농장원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알기 위해서는 포전으로 찾아다녔으며 이동봉사도 진행하였다.

어떻게 하면 주민들에게 한가지 상품이라도 더 마련해주겠는가를 연구하던 서영주동무는 농사도 짓고 축산도 본때있게 해보리라 마음먹었다.그렇게 되면 상품확보에 필요한 더 많은 자금원천을 마련할수 있었다.

주민세대들에서 주문하는 상품들도 구해오고 몇명밖에 안되는 가내반성원들과 함께 비경지를 일구어 농작물을 심어가꾸느라 그는 언제 한번 편히 앉아있을 사이도 없었다.집짐승우리도 새로 건설하고 여러가지 먹이풀도 극성스레 장만하였다.

상점자체로 수확한 농작물을 가지고 여러가지 부식물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공급하니 그들의 식생활에 큰 보탬을 주었다.상점에 알곡가공기지도 꾸려져 주민들이 어느때나 리용할수 있게 되였다.

인민들이 요구하는 상품을 제때에 알고 해결해주기 위해 그는 인민반장들과 긴밀한 련계를 가지였다.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인민반장들이야말로 누구보다 그들의 살림살이형편을 잘 알고있기때문이였다.인민반장들은 인민반원들이 제기하는 상품을 알아가지고 때없이 그를 찾아왔다.

그렇게 되니 모든 주민들의 가정생활형편을 더 환히 알수 있었다.

언제인가 상점에 찾아왔던 손님들이 매대에는 상품이 꽉 차있는데 건물이 초라하여 어울리지 않는다고 우스개소리를 했다.그 말이 서영주동무의 마음을 아프게 자극했다.

바로 그때 위대한 장군님께서 함주군 동봉협동농장(당시)을 현지지도하시던 길에 동봉상점에도 들리시여 상점을 깨끗하게 잘 꾸리고 상품이 많은데 대하여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신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인민들에게 더 좋은 생활조건을 마련해주시기 위해 쉬임없이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 상점에 찾아오신다면…

서영주동무는 가슴이 철렁했다.지금껏 주민들에 대한 상품공급에만 신경을 쓰면서 상점의 면모를 시대의 요구에 맞게 일신시키기 위한데 낯을 돌리지 못했던 자신이 더없이 민망스러웠다.

그는 상점을 말끔히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번듯하게 새로 건설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결심과 실천사이에는 너무도 커다란 장벽이 가로놓여있었다.건설에 필요한 자금과 자재는 어떻게 마련할것인가.

집의 가산도 내오고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도움도 받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건설자재가 어방없이 모자랐다.안타까이 속을 썩이던 어느날 인민반장들이 찾아와 상점을 잘 꾸리는것도 주민들을 위한 일인데 자기들도 적극 돕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여 인민반장들이 떨쳐나 파철을 모아들였고 그처럼 어렵게만 생각되던 강재문제도 해결되였다.

밤낮으로 블로크를 찍고 콩크리트기초를 다지며 일손을 다그치던 그는 끝내 육체적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자기를 찾는 가내반성원들의 울음섞인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뜬 서영주동무는 가까스로 몸을 가누며 일어섰다.그리고는 또다시 일손을 잡으려 했다.그러다 골병이 들겠다며 가내반성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의 마음은 고작해서 한개 리의 농장원들과 주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나요.온 나라 인민을 돌보시며 언제나 마음쓰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로고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그이께 기쁨을 드릴수 있다면 전 정말 열백밤을 새우고 온몸을 녹인대도 후회가 없겠어요.》

이런 불덩이같은 모습을 과연 어디에 비길수 있으랴.

얼마후 룡굴상점은 도시상점에도 짝지지 않을만큼 새 모습으로 일떠섰다.

상점건물도 일신되고 갖가지 상품들로 매대를 꽉 채웠지만 인민들을 찾아가는 서영주동무의 걸음새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오히려 더 커지고 더 빨라졌다.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에서는 《우리 상점책임자》, 《리의 주부》라는 인민들의 다정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나왔다.

《주민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그들의 요구를 해결하여가지고 먼저 찾아가면 그들은 우리 당의 은정을 더 뜨겁게 새겨안을것입니다.》

서영주동무의 그 말이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안겨주었다.

우리 나라에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단위와 초소가 얼마나 많은가.

그가 누구이든 서영주동무와 같이 항상 인민들을 찾아가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활과 편의를 최대한 도모해주기 위해 애쓴다면 우리 당의 사랑이 더 빨리 가닿게 되고 그런 사람은 인민의 참된 충복이라는 값높은 부름과 함께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는것이다.

 

여기는 당정책을 지키는 초소이다

 

《서영주동무가 공급하는 상품들이 비록 크지 않아도 주민들이 왜 그것을 그처럼 무겁게 받아들이는지 압니까.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에 변함없이 안겨지는 당의 은정이 너무도 고마와서입니다.그러고보면 그가 진행하는 봉사활동은 말없는 정치사업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리당일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서영주동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자기의 혁명초소를 지켜가는가를 잘 알수 있었다.

그는 상점을 단순히 상품을 팔고사는 봉사거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비록 크지 않은 산골상점이여도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우리 당정책이 집행되는 더없이 신성하고 영예로운 초소로 간주했다.그런 마음으로 인민들이 당정책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페부로 절감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가지 좋은 일도 스스로 찾아하였다.

상점의 교원매대도 바로 그렇게 생겨난것이였다.

우리 당의 교육중시정책관철에 적극 이바지할 일념을 안고 상원군 룡굴고급중학교에 찾아간 그는 교원들의 교육사업과 생활에 필요한 물자들을 알아보았다.얼마후 상점에는 교원들을 위한 매대가 따로 꾸려졌고 매달 첫주 토요일마다 교원들에게 물자들을 정상적으로 공급하게 되였다.명절을 앞두고 교원들에게 고기와 여러가지 식료품을 공급하고 생활에서 애로를 겪는 문제도 솔선 도맡아 해결해주며 서영주동무는 교육사업을 위해 아낌없는 지성을 기울이였다.

장난이 세차고 농촌길을 오가며 인차 해지는 학생들의 신발을 두고 누구보다 마음을 쓴 사람이 서영주동무였다.

그는 자체로 마련한 신발을 가지고 학교에 자주 찾아가 신발이 해진 학생들에게 갈아신기군 하였다.그렇게 신긴 신발이 한달에만도 수십컬레를 헤아리니 지금까지 수십년간 그가 학생들에게 보장해준 신발은 그 얼마이랴.

교원들과 학부형들이 지금도 잊지 못해하는 42문짜리 신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학생들속에는 발이 유별나게 큰 학생이 있었다.

언제인가 상점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속에서 유독 장화를 신고가는 학생이 서영주동무의 눈길을 끌었다.그 학생에게 물으니 자기는 42문짜리 신발을 신어야 하는데 여유가 없어 아버지의 장화를 신었다는것이였다.

주민들의 생활을 손금보듯 한다고 자처하던 내가 왜 그것을 몰랐을가.

심한 자책감을 안고 장화를 신은 학생에게서 오래도록 눈길을 떼지 못하던 그는 백수십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어느한 신발공장으로 달려갔다.한 학생을 위해 먼길을 달려온 그의 진정은 공장일군들과 종업원들의 심금을 쳤다.

공장의 일군들과 종업원들이 문수가 큰 수십컬레의 신발을 새로 만들었을 때는 별이 총총한 한밤중이였다.신발들이 들어있는 배낭을 지고 길을 떠나려는 서영주동무에게 공장의 일군들과 종업원들은 밤도 깊었는데 합숙에서 자고 아침에 떠나라고 권고했다.

다음날 아침에 학생이 새 신발을 신고 등교길에 오르게 하자면 한시도 지체할수 없다고 하면서 걸음을 다그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공장의 일군들과 종업원들은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친부모인들 저보다 더 극진하랴.

배낭을 지고 밤길을 걸으며 서영주동무는 이런 결심을 더욱 가다듬었다.

정춘실영웅도 인민을 위해 남모르는 이런 밤길을 많이 걸었기에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그처럼 기뻐하셨으리라.나도 인민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뛰고 또 뛰여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 기쁨을 드리리라.

다음날 아침 서영주동무가 신겨준 새 신발을 신고 나는듯이 학교로 뛰여가는 자식의 모습을 보며 학생의 부모는 고맙다고 거듭 인사말을 하였다.그들에게 서영주동무는 만시름이 풀리는듯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당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품을 들이고있나요.나는 그저 당에서 바라는 일을 했을뿐입니다.》

소년단에 입단하는 학생들에게 붉은넥타이와 소년단휘장을 마련해주고 학생들이 운동회를 하거나 등산을 갈 때마다 성의껏 준비한 물자들도 보내주는 서영주동무에게 교원들과 학생들은 필요한것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찾아가군 하였다.

서영주동무의 아들이 혁명의 군복을 입고 초소로 떠날 때였다.

아들을 바래우기 위해 역전으로 나갔던 그는 군복입은 자식들에게 언제나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결사옹위하는 제일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절절히 당부하는 여러 부모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학창시절을 마치고 조국보위초소에 서는 청년들의 가슴속에 고향의 모습을 더 깊이 새겨주자.그래서 그들이 고향의 기대, 모교의 기대를 늘 잊지 않고 군사복무의 나날을 충성과 위훈으로 수놓아가게 하자.

이렇게 생각한 그는 해마다 조국보위초소로 떠나게 될 청년들에게 성의껏 마련한 물자들을 공급해주었다.그와 함께 고향과 부모, 스승과 동무들의 기대가 담긴 글을 적으라고 수첩도 안겨주었다.

서영주동무가 리안의 수많은 주민세대들중에서도 남달리 찾는 가정들이 있다.전쟁로병, 영예군인, 전사자, 피살자가정이다.그는 국가적인 명절날들은 물론 그 가정들에 대사가 제기될 때마다 온갖 성의를 다하면서 그들이 당의 사랑과 믿음을 잊지 않고 혁명의 피줄기를 굳건히 이어가도록 떠밀어주었다.

주민세대들에서 결혼식을 하고 늙은이들이 생일을 맞을 때마다 물자들을 보장해주고 아기가 태여나면 애기옷도 마련해주는 그의 마음씨는 정말 꽃보다 더 곱다고 주민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우리는 여기에 리에 살고있는 로인이 들려준 한가지 사실만을 더 적으려고 한다.

서영주동무의 딸이 결혼식을 하던 날이였다.

오래간만에 새옷을 차려입고 대문밖을 나서려던 그를 친척들이 멈춰세웠다.그가 새옷에 어울리지 않게 색이 바랜 낡은 신발을 신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런 날에야 구두를 신고 척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며 친척들이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온통 낡은 신발들뿐이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서영주동무에게 갈아신을 온전한 신발 한컬레도 없다는것을 알고 혀를 찼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많은 새 신발을 신겨준 상점책임자에게 제가 신을 신발만은 없구만.저런 사람을 어찌 우리 당이 바라는 효녀에 비기지 않을수 있겠소.》

서영주동무가 수십년을 리용하는 《우리 가정수첩》에는 리에서 단 한세대만이 올라있지 않다.바로 그의 가정이다.

《우리 가정수첩》에 인민을 위한 자리는 있어도 자기를 위한 자리는 있을수 없다는것이 그의 봉사원칙이였다.

우리 당정책을 진심으로 받드는 충신, 인민을 위하여서는 그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참된 충복만이 이렇듯 《우리 가정수첩》에 헌신적인 복무의 기록만을 아로새길수 있는것이다.

* *

우리 공화국의 력사에는 《우리 가정수첩》과 함께 태여난 정춘실운동이 자랑스럽게 기록되여있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인 서영주동무와 같이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를 신념으로, 인생관으로 간직한 인민의 참된 복무자들이 있어 정춘실운동의 생활력은 오늘도 변함없이 발휘되고있다.

이 땅에 인민을 위해 멸사복무하는 이런 애국자들이 많을 때 우리 당정책이 빛나게 관철되고 로동당만세소리, 사회주의만세소리는 더 높이 울려퍼질것이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조경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