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 《로동신문》 4면
우리가 소개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볼수 있는 평범한 우편통신원이다.크지 않은 키에 수수한 옷을 입고 늘 편리화를 신고다니는 소박한 녀성…
하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참으로 감탄할만한것이다.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우편통신길을 이어갔기때문만이 아니다.머나먼 통신길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10여정보에 달하는 산에 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며 사회와 집단을 위한 좋은 일을 수많이 찾아한 그의 고결한 정신세계에 머리가 숙어지기때문이다.
《애국의 마음은 조국과 인민을 위한 실천활동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한 인간의 모습에서 시대를 보게 되는 때가 있다.판교군체신소 우편통신원 신향춘동무의 인생길을 더듬어보느라면 사회주의 내 나라가 무엇으로 그처럼 아름답고 굳건한가에 대한 대답을 찾을수 있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느라면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그러나 그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사회와 집단, 조국을 위한 길만을 택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신향춘동무는 이 땅의 평범한 근로자이지만 조국과 나, 고향과 가정, 개인과 집단이라는 선택의 갈림길마다에서 언제나 나라와 집단을 위한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자기의 모든것을 기꺼이 바쳐왔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군탁아소유치원물자공급소에서 일하던 신향춘동무가 우편통신원이 된것도 그때문이였다.강도 많고 산도 험해 늘 걸어다녀야 하는 풍현리의 우편통신길은 참으로 힘겨웠다.그러다나니 여러 우편통신원이 풍현리를 담당했다가는 인차 물러서군 하였다.
누가 시킨 사람도 없었다.또 그가 굳이 그길을 택하지 않는다고 하여 탓할 사람도 없었다.만약 그때 신향춘동무가 자기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우편통신원의 일을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또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했다면 그의 인생은 오늘처럼 애국자라는 값높은 부름과 더불어 군과 도의 지경을 넘어 그렇듯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것이다.매일같이 50리가 넘는 산길을 걷느라니 두다리는 늘 부어있었고 새로 신은 신발도 한주일을 넘기지 못하군 했다.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이면 때로 신음하며 앓은적도 있다.하지만 그는 다음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듯이 또다시 밝은 얼굴로 우편통신길에 나섰다.자기가 정히 가져온 당보를 받아안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가 그에게는 제일 행복한 순간이였던것이다.
그러던 그는 두해가 지난 어느날 또 하나의 어려운 일감을 스스로 맡아안았다.우편통신원이 되여 매일같이 생땅이 드러난 수리봉을 바라보며 길을 걷자니 가슴이 아파나는것을 금할수 없었던것이다.
산에 무성한 숲이 펼쳐지지 못한것이 어찌 산림감독원의 책임이라고만 하겠는가.수리봉도 다 우리 고향의 산인데 우리는 과연 뭘 하고있는가.
이런 량심의 물음이 가슴을 칠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우편통신길을 걸으면서 매일 다문 몇그루씩이라도 나무를 심으면 고향산천을 푸르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갈마들었다.
하여 그는 산림감독원을 찾아가 자기의 진정을 터놓았다.그리고는 편제없는 산림감독원이 되여 수리봉지구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허나 나무심는 일은 헐한것이 아니였다.산림감독원에게서 나무모를 받아 심고 또 심었지만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사름률이 높지 못했다.결정적으로 토질조건이 비슷한 곳에서 나무모를 자래워야 했다.
얼마후 수리봉과 가까운 그의 집터밭에 나무모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터밭농사는 우편통신길을 걸으면서부터 그가 집살림에 보탬하기 위해 할수 있는 유일한 일이였다.가정주부로서 그런 터밭을 제손으로 갈아엎고 나무모를 심자니 그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그런 그에게 힘을 준 사람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남편이였다.
우리가 생색이나 내자고 이길에 들어섰는가고, 제살림을 먼저 생각해서야 어떻게 애국의 길을 갈수 있겠는가고 하며 남편이 손에 들려주는 《우리 가정수첩》을 받아드니 생각이 깊어졌다.그 첫장에는
결코 살림이 풍족해서가 아니였다.우리
그때부터 신향춘동무의 집터밭에서는 남새가 아니라 나무모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했다.얼마후부터는 우편통신가방과 함께 나무모배낭이 그의 두어깨를 무겁게 파고들었다.그래도 그의 땀젖은 얼굴에는 늘 웃음이 비껴있었다.때로 휴식일이면 온 가족이 나무심는 일에 달라붙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그런 쉽지 않은 결심을 내리였는가고 물을 때면 그는 이렇게 말하군 했다.우리 고향산천에 푸른 숲이 우거진다면 그처럼 기쁘고 보람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였다.우편통신을 마치고 늦게야 온 가족이 나무를 심는 산으로 올랐던 신향춘동무는 우연히 자식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누나, 난 차라리 휴식일이 없으면 좋겠어.》
《그건 왜?》
《남들은 명절이나 일요일에
한창 놀음에 정신이 팔려있을 나이에 일요일에도 부모와 함께 산을 가꿔야 하는 안타까움을 누나에게 하소연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느라니 신향춘동무의 눈굽은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도 자식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였다.이 세상 부모들치고 자식들이 즐겁게 뛰여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만 눈먼사랑만으로는 자식들을 옳바로 키울수 없기에 그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머금으며 자식들을 자기가 가는 길로 이끌었던것이다.
그 나날 키보다 먼저 애국의 마음이 자란 아들 현상이는 조선소년단창립 70돐 경축행사에 참가하여
그때부터 신향춘동무는 더욱 바쁘게 살았다.언제부터인가 그의 어깨우에는 우편통신가방과 나무모배낭외에 또 다른 짐들이 덧지워졌다.농장원들을 대신하여 영농물자를 날라오기도 했고 시집간 딸자식에게 보내는 이웃들의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군 했던것이다.그러다나니 그의 잔등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늘 땀에 젖어있었다.
흔히 남의 짐은 갑절로 무겁게 여겨진다고 한다.하지만 그는 언제한번 힘들다는 내색을 한적도 없었고 그 대가를 바란적은 더우기 없었다.농장과 마을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자신의 일로 여기였기때문이다.
하기에 그는 일부 사람들에게서 자기 가정을 위한 짐을 지고다니는데 더 신경을 쓰지 않는가 하는 오해를 받을 때에도 아무런 내색없이 그길을 이어갔다.그때를 추억하며 우편작업반 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후에야 사연을 알게 된 우리가 그때 왜 한마디 말도 안했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가 그들의 일을 도와주면 그 시간에 농장원들이 김이라도 한번 더 매고 풀이라도 한단 더 벨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사실 그가 하는 일들은 하나하나가 다 누구나 쉽게 할수 없는 소행들이다.일생에 그런 일을 한가지라도 스스로 맡아 꾸준히 한다 해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떠받들리울수 있지만 그는 그 어려운 일감들을 자그마한 두어깨에 모두 걸머졌다.그리고 오랜 세월 변함없는 한모습으로 살아오고있다.
하다면 체소한 그 녀인은 과연 무엇으로 하여 그처럼 덧짐에 덧짐을 지고도 무한한 행복감을 안고 사는가.
자기를 바쳐 고향과 마을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수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다는 아름다운 마음이였다.그처럼 뜨거운 마음을 지닌 사람앞에서는 누구나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기에 그가 걷는 우편통신길에서는 군책임일군들을 비롯한 군일군들과 군인민들은 물론 도에서 내려온 일군들까지도 조금이라도 그를 도와주려고 진정을 바치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부모의 일손을 돕던 그의 두 자식도 조국보위초소에 섰다.하지만 고향을 위한 신향춘동무의 일욕심은 만족을 몰랐다.수리봉에 무성한 숲을 펼쳐놓은 그는 두해전부터 또 다른 산들을 맡아 가꾸어가고있다.
오늘도 고향과 마을사람들을 위한 무거운 짐을 지고 쉬임없이 우편통신길을 이어가는 그의 가슴속에는 군사복무를 하는 딸에게서 받은 편지가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지금도 어머니는 고향을 위해 많은 일감을 찾아하고있겠지요.이제 제대되면 어머니가 걸어간 그길을 우리 자식들이 이어가겠습니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김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