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8. 《로동신문》 6면
제4차 중동전쟁이후 이스라엘은 침략의 예봉을 레바논에로 돌리였다.
당시 팔레스티나해방조직 중앙위원회가 레바논의 수도 바이루트에 자리잡고있었다.팔레스티나해방조직 무장력은 레바논남부에 거점을 두고 반이스라엘투쟁을 계속 벌려나갔다.
1978년 3월 이스라엘인들이 탄 뻐스가 텔 아비브부근에서 전복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팔레스티나해방조직의 소행으로 몰아붙인 이스라엘은 그에 대한 《보복》을 운운하며 레바논에 침입하였다.하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해방조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레바논남부에 《안전지대》를 창설하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스라엘은 보다 큰 전면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기회만을 노리였다.바로 그러한 때인 1982년 6월 3일 영국주재 이스라엘대사가 런던에서 3명의 아랍인들에 의해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스라엘은 그것을 무작정 팔레스티나해방조직의 소행이라고 고집하면서 레바논남부에 있는 팔레스티나항쟁세력기지들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과 포격을 감행하였다.팔레스티나해방조직 무장력이 이에 대한 보복타격을 가하자 이스라엘침략자들은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여 6일 레바논남부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작전을 시작하였다.이로써 레바논전쟁이 발발하였다.
레바논전쟁은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8월에 팔레스티나해방조직과 이스라엘사이의 정화합의가 이룩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였다.
사실상 레바논침략전쟁은 이스라엘을 내몰아 아랍나라들을 각개격파하여 중동지역을 제 손아귀에 거머쥐려는 미제의 일관한 지배전략에 따른것이다.미제는 이 전략을 수행하는데서 팔레스티나항쟁운동을 주되는 장애물로 보고 이를 소멸하도록 이스라엘을 부추기고 뒤받침해주었다.
미제는 이스라엘과 레바논침략을 사전에 모의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침략행위를 확대하도록 조건을 조성해주었다.이스라엘국방상을 워싱톤에 불러들여 침략계획을 구체적으로 모의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나자 곧 지중해수역에 항공모함을 집결시키고 레바논과 팔레스티나인민들을 위협하였다.
미제는 전쟁초시기에 유엔안전보장리사회에서 레바논으로부터의 이스라엘침략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으며 침략자들에 의하여 서부바이루트가 봉쇄되고 여러날째 생활용수와 전기, 식료품공급이 단절되여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있을 때 유엔에 제출된 서부바이루트봉쇄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반대해나섰다.뿐만아니라 미제는 이스라엘침략자들에게 각종 살륙무기들을 넘겨주었으며 지어 투항할것을 팔레스티나해방조직에 요구하면서 이스라엘군을 서부바이루트에 투입시키겠다고 한두번만 위협하지 않았다.
9월 이스라엘침략자들이 서부바이루트에 들어가 두개의 팔레스티나피난민수용소를 포위하고있을 때 미국의 중동특사 드레이퍼는 이스라엘수상 베긴과 마주앉아 밀담을 벌렸다.같은 날 미국무성은 성명을 발표하여 미국은 서부바이루트로부터 이스라엘의 철수에 관한 《각본을 내보일 생각이 없다.》고 함으로써 이스라엘침략자들이 마음놓고 레바논의 수도에 틀고앉아 소름끼치는 만행을 감행하도록 허용하였다.
바이루트에서 대학살만행이 감행되고 전세계가 격분에 넘쳐 이스라엘을 단죄하며 징벌할것을 요구하고있을 때 미국대통령 레간은 방송연설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속죄할수 있게 하는 《징벌》이란 없다고 하면서 하수인을 두둔해나섰다.
레바논전쟁은 팔레스티나를 비롯한 아랍나라들에 커다란 불행과 재난을 들씌웠다.전쟁으로 말미암아 수만명의 평화적주민들이 희생되고 수십만명의 인민들이 집을 잃고 고향을 떠나게 되였다.팔레스티나해방조직 성원들은 투쟁무대를 다른 아랍나라에로 옮기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이스라엘침략자들의 무분별한 령토팽창야욕과 미제의 교활한 간섭책동으로 하여 민족적자주권과 령토를 되찾으려는 팔레스티나인민들의 투쟁은 가슴아픈 실패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본사기자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