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만에 첫 자동차를, 2년후에는 3 000대를!
《당의 부름이라면 한마음한뜻으로 떨쳐일어나 산도 옮기고 바다도 메우는 기적을 끊임없이 창조해나가는것은 우리 인민의 투쟁전통이며 기질입니다.》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증산의 불길이 날로 세차게 일어번지는 오늘의 벅찬 현실을 안아볼수록 놀라운 기적과 위훈으로
그들중에는 당의 호소를 높이 받들어 40일만에 첫 화물자동차를 만들고 2년후에는 3 000대를 생산한 덕천의 로동계급도 있다.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보수주의와 소극성, 기술신비주의를 타파하며 대담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실천함으로써 사회주의건설에서 대고조를 이룩할것을 호소한 1958년 9월 당중앙위원회 편지를 받아안은 그들은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화물자동차생산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설계도면도 설비도 없었지만 그들은 자동차를 분해하여놓고 설계를 그리고 부속품을 깎아나갔으며 망치로 차체를 만들었다.
이러한 때에 공장을 찾으신
온 덕천이 화물자동차개발로 부글부글 끓어번졌다.사대주의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걸음걸음 그들의 투쟁을 가로막아나섰다.
하지만 덕천의 로동계급은 한달도 못되는 기간에 많은 설계도면과 기술혁신안을 완성하고 수백종의 부분품과 부속품들을 만들어냈으며 자체로 프레스를 제작하여 차체를 다량생산할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놓았다.하여 불과 40일만에 《공장의 맏아들》이라고 부르는 첫 화물자동차를 기어이 만들어내놓았다.빈터에서 맨주먹으로 40일만에 만든 첫 화물자동차, 진정 그것은 덕천로동계급이 사대주의와 기술신비주의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벌리면서 앞길을 가로막는 보수주의와 소극성을 불사르며 안아올린 고귀한 산아였다.
결코 이뿐이 아니다.그들은 첫 시제품을 만든 후 3 0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할것을 당앞에 결의하고 그 실현을 위한 과감한 투쟁을 벌려나갔다.
초기에 그들은 이러저러한 난관으로 하여 하루평균 3~4대의 자동차밖에 생산하지 못하였다.허나 그들은 얼마후에는 일평균 15~16대수준으로, 년말을 앞둔 40일동안에는 하루에 그보다 더 많은 화물자동차를 생산하는 놀라운 기적을 창조하였다.
제관직장(당시)의 로동자들은 대동강가에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실기 《고난의 40일》을 독보하였다.그리고 앞으로 남은 40일간에 자동차생산계획을 기어이 완수할 굳은 결의밑에 40일돌격대를 조직하고 지난 시기의 근 3배에 달하는 생산실적을 올리였다.
이들의 투쟁에 고무된 모든 직장들에서 불과 며칠사이에 70여개의 돌격조들이 조직되였고 전체 로동자들이 한사람같이 떨쳐나서게 되였다.
공장의 일군들과 기술자들은 현장에서 로동자들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즉석에서 풀어주었고 사무원들도 현장에 달려나와 로동자들의 일손을 도왔다.병원의 의사, 간호원들은 위생가방을 메고, 리발사들은 리발도구를 들고, 합숙관리원들은 밥그릇과 국동이를 이고 생산현장으로 달려나갔으며 가정부인들까지도 남편들의 일을 도와나섰다.
1960년 12월 어느날 1시, 드디여 마지막 3 000번째 자동차조립이 끝났을 때 온 공장에
날밝기 전까지 당중앙위원회로 달려가 승리의 보고를 올리자.
이런 불같은 일념을 안고 그들은 자기들의 피땀이 스민 3 000번째 자동차를 몰고 그달음으로 평양으로,
그때로부터 세월은 멀리도 흘렀다.
오늘도 의연 어렵고 부족한것은 많다.하지만 전세대 로동계급이 겪었던 시련에 비해볼 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전세대들이 허리띠를 조이며, 혁명가를 부르며 높이 발휘했던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투쟁정신을 변함없이 계승해나갈 때 우리가 못해낼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나, 어디서나 보수주의와 소극성을 불사르며 기적의 천리마시대를 떠올린 전세대들처럼 대담하게 창조하고 대담하게 실천해나갈 때 당창건 80돐과 당 제9차대회를 자랑찬 로력적위훈으로 맞이하기 위한 올해의 투쟁에서는 또다시 기적적승리가 이룩되게 될것이다.
본사기자 림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