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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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5일 화요일 4면

3대를 이어 영광의 땅을 가꾸어가는 애국농민일가

룡강군 옥도리에서 살고있는 림근상영웅가정에 대한 이야기


충성과 애국의 넋은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받아안은 당의 은덕을 순간도 잊지 않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보답하기 위해 피와 땀을 아낌없이 바칠 때만이 참답게 계승된다.

우리는 그것을 룡강군 옥도리에서 살고있는 림근상영웅의 후손들의 모습을 통하여 다시금 가슴깊이 절감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참된 삶의 가치도 행복도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습니다.》

림근상영웅의 며느리인 최진복로인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몸소 다녀가신 사연깊은 살림집에서 살고있었다.

여든이 지났지만 아직도 정정해보이는 그와 함께 살림방에 들어서던 우리는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영광의 기념사진들이 벽면을 꽉 채우다싶이 정중히 모셔져있었던것이다.시아버지인 림근상영웅과 남편인 림기환동무가 수여받은 영웅메달들을 가리키며 최진복로인은 추억의 실꾸리를 풀어나갔다.

그가 처음 이 집문턱을 넘어섰을 때 사람들은 영웅집며느리가 되였다고 그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랐다.하지만 영웅가정의 식솔이 되였다고 하여 그 정신과 넋을 저절로 지니게 되는것은 아니였다.

영웅집의 가풍을 따르자고 농장벌에 나갔지만 농사일은 너무도 힘에 부쳤다.하루종일 밭김을 매다가 들어와 물집이 진 손에 붕대를 감으며 남몰래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고 하루과제를 수행하지 못해 남편의 꾸중을 듣는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시아버지는 이렇게 말해주군 하였다.우리 수령님의 뜻을 정히 받들자면 그 어떤 고생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림근상영웅은 앉으나서나 오직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집행밖에 몰랐다.그는 어느 하루도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실천하는데서 부족한것은 무엇이고 미진된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수령님의 뜻을 옳게 받드는것으로 되는가를 깊이 돌이켜보지 않는 때가 없었으며 못다한 일을 다 찾아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군 하였다.

언제인가 밤새 앓음소리를 내던 림근상영웅이 새벽닭이 울기 바쁘게 삽을 들고 집대문을 나서려는것을 띄여본 집식구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그때 그는 이렇게 절절히 말했다고 한다.이 림근상의 생은 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해 필요한것이라고, 수령님의 교시를 아직 다 관철하지 못했는데 어찌 제 한몸부터 생각하겠는가고.

혁명전사의 삶의 영예와 행복은 오직 수령의 뜻을 충직하게 받드는데 있으며 대를 이어 충성의 한길만을 곧바로 걸어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깊이 새기고 농장의 관리위원장(당시)이 된 아들 림기환동무도 농사를 잘하기 위해 잠도 휴식도 잊고 일하였다.

그는 농장주변에 퇴비원천이 많지 못하기때문에 어쩔수 없다고만 생각하던 사람들의 그릇된 관점을 돌려세우기 위해 잡관목분쇄기를 제작하여 부식퇴비를 넉넉히 낼수 있게 하였으며 당 제6차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오는길로 부침땅면적을 계속 늘일데 대한 당대회결정을 높이 받들고 농장원들의 앞장에서 수십정보의 새땅을 얻어냈다.

농사일밖에 모르는 소박하고 근면한 가정,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집행에서는 한치의 드팀도 몰랐던 충신가정의 며느리인 최진복녀성도 달리는 살수 없었다.

그는 시집온 첫날부터 남먼저 새벽문을 열고 나갔다가 밤늦게야 돌아오군 하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이악하게 일하면서 작업반장으로 성장하였다.그의 작업반은 농장적으로 제일먼저 3대혁명붉은기, 2중3대혁명붉은기를 쟁취하는 영예를 지니였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그는 년로보장을 받았다.하지만 그는 쉽게 일손을 놓을수 없었다.대를 두고 받아안은 당의 은덕에 보답하자면 한생을 다 바쳐도 모자란다고 하면서 해마다 가정에서 돼지를 길러 질좋은 거름을 생산하고 소농기구들을 마련하여 농장에 보내주었으며 바쁜 농사철에는 농장벌에 달려나가 농장원들의 일손도 도와주군 한다.

지금은 림근상영웅의 손자며느리인 로승희동무가 이곳 농장경리로 사업하고있다.

림기환동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인 림광욱동무가 농장관리위원장(당시)으로 임명되였다.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일만을 위해 뛰여다니던 림광욱동무가 생의 마지막나날까지 제일 걱정한 문제는 농장의 축산을 추켜세우는것이였다.할아버지와 아버지대에 그쯘하게 갖추어졌던 축산토대가 고난의 시기를 겪으면서 점차 빈약해졌던것이다.하여 당시 옥도리에서 혁명사적관 강사로 일하던 그의 안해 로승희동무는 당의 뜻을 받드는 길에서는 고생을 사서라도 해야 한다고 하던 시아버지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고 자진하여 축산작업반에 진출하였다.

집짐승우리들을 번듯하게 일신시키고 집짐승마리수와 먹이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그가 걸은 길은 얼마였던가.아글타글 애쓰며 축산작업반을 추켜세웠을 때 사람들은 영웅가정의 손자며느리가 역시 다르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후날 당의 높은 정치적신임에 의하여 경리로 사업하게 된 로승희동무가 제일먼저 시작한 일은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을 형상한 모자이크벽화주변을 정중히 꾸리기 위한 사업이였다.그는 이 사업을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농장원들의 가슴속에 옥도리에 깃든 당의 사랑을 더욱 깊이 새겨주기 위한 중요한 사업으로 여기고 낮에는 자재해결을 위해 뛰여다니고 밤이면 농장청년들과 함께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느라 몹시 힘겨웠지만 로승희동무는 잠시도 주저앉지 않고 억척같이 일하였다.그의 모습을 보고 온 마을사람들이 떨쳐나선 결과 공사는 한주일만에 결속되였다.

로승희동무는 농산작업의 기계화비중을 높일데 대한 당의 뜻을 높이 받들어 농기계들을 새롭게 개조하고 농장원들이 과학농사에 대한 옳바른 인식을 가지도록 교양하는 한편 앞선 영농방법을 대담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사업도 적극 밀고나갔다.하여 농장에서는 지난해에도 국가알곡생산계획을 넘쳐 수행하고 결산분배를 떠들썩하게 진행하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충성과 애국을 삶의 근본으로, 변함없는 가풍으로 이어가는 애국농민일가의 참된 량심과 의리가 뜨겁게 안겨왔다.

최진복로인은 우리에게 자기가 새끼를 꼬고 소농기구를 마련하여 농장에 보내주는것도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못다 걸은 길을 끝까지 이어가고싶어서라고, 내가 가다 쓰러지면 며느리가 가고 그 자식들이 가면서 영웅가정의 넋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을 새겨보는 우리의 귀전에 림근상영웅의 마지막당부가 쟁쟁히 들려오는듯싶었다.

《내가 찍어온 발자욱보다 너희들이 찍는 발자욱이 더 깊어야 한다.그래야 우리 수령님의 념원이 이 땅에 더 활짝 꽃펴날수 있다.》

애국농민의 그 고결한 넋은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바쳐가고있는 후대들의 실천속에 꿋꿋이 이어지고있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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