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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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7일 목요일 3면

당은 나의 어머니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뜨거운 사랑


지금도 사람들이 즐겨읊는 시들가운데는 나의 아버지 김상오가 예순살이 넘어 창작한 서정시 《나의 조국》도 있다.창작된지 46년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이 시를 변함없이 애송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 늘 하던 말이 떠오르군 한다.

《나는 서정시 〈나의 조국〉에 두번다시 삶을 받은 심정,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나의 다함없는 감사와 흠모의 정을 담으려고 애썼다.》

한없이 뜨거운 사랑으로 인생말년에 청춘기를 다시 안겨준 위대한 당의 품이 없었다면 과연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수 있었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표창을 수여받고 김일성상수상자로, 반일애국렬사로 한생을 빛나게 장식할수 있었겠는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당의 인덕정치는 인민들에 대한 숭고한 사랑과 믿음의 정치이며 인민대중을 당의 두리에 철통같이 묶어세우는 혁명적단결의 정치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황해북도 곡산군의 어느한 농장에서 농장원으로 일하고있던 1977년 2월 어느날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농장원인 아버지를 당중앙위원회에서 급히 찾는다는것이였다.사실 아버지는 14년전에 반당종파분자들의 책동에 의하여 억울한 루명을 쓰고 출당철직되여 농사일을 하고있었다.

이제는 친척친우들의 문안편지도 뜸해지고 가족들조차 모든것을 단념하였던 그때에 평양으로 올라온 아버지를 만난 당중앙위원회의 일군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무를 거듭 찾으시였다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무가 반당종파분자들의 모해에 걸려 그사이 정치적생명까지 잃고 대오에서 나간것을 몹시 가슴아파하시며 동무를 데려다가 복당시키라고 교시하시였다는 가슴뜨거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는 그 순간 자기가 당중앙위원회청사에 있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고 세찬 울음을 터뜨리였다고 한다.이윽하여 《입당년월일 1945년…》이라고 새겨진 당원증을 받아든 아버지는 더 세차게 어깨를 떨며 오열을 터뜨렸다.

심심산골에서 손바닥에 장알이 지도록 일하던 나날 아버지에게 있어서 제일 괴로운것은 처음 해보는 농사일로 인한 힘겨움이 아니라 농장에서 중요한 일이 제기될 때마다 《당원들은 남으시오!》라고 당세포비서가 말할 때였다고 한다.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홀로 조용히 앉아 저 멀리 평양하늘가를 바라보며 남몰래 눈굽을 적시군 했다.

그런데 당에서는 아버지를 정당원으로 복당시킬뿐 아니라 당생활년한도 본래 입당한 날부터 그대로 이어지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었으니 그때 아버지의 심정을 과연 어떻게 다 표현할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정녕 다 알수 없었다.말 못하는 마음속괴로움을 안고 홀로 눈물지을 때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평범한 한 시인의 운명을 두고 얼마나 마음쓰고계시였는가를.

아버지는 해방직후 위대한 수령님을 여러 차례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였다.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그에 대해 잊지 않고계시다가 언제인가 일제시기 아버지와 함께 투쟁한 반일애국렬사의 가족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해방직후 해주에 나가시였을 때를 회고하시면서 일군들에게 아버지에 대하여 알아볼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또한 황해남도를 현지지도하시면서도 그때 《자유황해》신문 주필을 하던 동무가 우리 당의 립장을 옳게 인식하고 좋은 글도 썼으며 자신의 사업을 방조하여주었다고 하시였으며 그후에도 해방직후에 있은 해주지구에 대한 현지지도를 회상하실 때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아버지에 대해 과분한 치하의 교시를 주시였다.

아버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관심과 보살피심을 받아안는 남다른 영광도 지닌 행운아였다.

아버지가 가사를 쓴 노래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높이 평가해주시며 아버지를 마음속깊이 새겨두고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버지가 평양에 올라왔을 때에는 그는 해방직후부터 오직 수령님만을 높이 우러러모시고 수령님께서 내놓으시는 로선과 정책을 적극 지지하여 싸웠으며 글로써 당을 받들었다고, 종파와 파벌들의 책동이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동요없이 당적립장을 잘 고수하였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후 당에서는 아버지를 문단에 다시 세워 어느한 창작사의 부사장으로 사업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하기에 아버지는 예순살이 지났지만 말그대로 청춘의 열정으로 다시금 창작의 붓을 들고 서정시 《나의 조국》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할수 있었다.그처럼 바라던 귀중한 정치적생명을 다시 받아안고 얼마나 아버지가 열정에 넘쳐있었는가 하는것은 예순살이 넘어서 쓴 글이 그전에 쓴 글의 무려 3배를 넘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후날 아버지는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서정시 〈나의 조국〉이 지상에 나타났을 때 필자의 나이를 아는 사람들중에는 놀라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러한 놀랄것도 감탄할것도 없다.그 시는 늙은 육체, 늙은 손이 쓴것이 아니라 젊고 뜨거운 넋이 쓴것이기때문이다.》

그렇다.자애로운 어머니당의 품이야말로 고목이나 다름없었던 아버지의 가슴에 청춘의 정열과 재능을 되살려주고 60청춘을 꽃피워준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영원한 삶의 품이다.

나는 말하고싶다.당이 안겨준 청춘의 열정이 없었다면 나의 아버지는 결코 서정시 《나의 조국》과 같은 작품을 창작할수 없었을것이라고, 위대한 어머니당의 품에 안겨살기에 이 땅의 평범한 시인도 인민이 대대손손 사랑하는 그런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수 있었다고.

평천구역 평천1동 14인민반 김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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