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명줄
이제는 세월이 흘러 인생길에서 겪었던 무수한 일들이 삭막하다.하지만 다 시들어가던 우리 가문이 어머니당의 품속에서 재생의 빛을 받아안던 그 영광의 나날들은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해도 정녕 잊을수 없다.
《병든 자식, 상처입은 자식을 탓하지 않고 더 마음을 쓰며 사랑과 정으로 품어주고 아픈 상처를 감싸주며 또다시 일으켜 내세워주는 품, 이것이 어머니 우리당의 품입니다.》
나의
어릴적 나의 마음속에는
하지만 그후 우리 가정이 뜻하지 않은 곡절을 겪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루는 어머니가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하는것이였다.그때 예닐곱살밖에 안되던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서럽던지 다짜고짜 이사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썼다.
당시 반당수정주의분자들은 자산계급출신의 문화인들을 당의 품에서 어떻게 하나 떼여내려고 갖은 비렬한 책동을 다하였다.그자들은 그때 작가였던 나의 큰할아버지 최명익도 《상속받은 대지주》이며 《왜정때 사각모에 백마타고 자기의 100리벌을 돌아보던 사람》이였다고 락인찍어놓고 철직시켜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해방전에 큰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땅을 상속받은것은 사실이였다.
하지만 그후 큰할아버지는 자기의 토지를 모두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해방직후에는 우리 나라의 문화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중의 한명으로서
그러나 반당수정주의분자들은 그의 해방전경력을 집요하게 걸고들면서 당과 조국을 위해 충실히 일하던 큰할아버지에게 끝끝내 《대지주》의 딱지를 붙여놓고 혁명대오에서 떼여버리는 비렬한짓을 감행하였다.그 여파가 가족친척들에게까지 미쳐왔던것이다.
우리 일가친척모두는 가슴속에 피눈물이 흘렀지만 어쩌는수가 없었다.
그때
《성조야,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 온 가족은 당만을 굳게 믿고 꿋꿋이 살아가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린 나로서는 다 리해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철이 들면서 나는 잘난 자식, 못난 자식 가리지 않고 다 품어안아 온갖 정을 기울이는 어머니마냥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보살펴주는 당의 사랑과 믿음에 대해 차츰 깨닫게 되였다.
철따라 공급해주는 새 교복도 다른 집 아이들과 꼭같이 받아안았고 운동회나 등산을 하는 즐거운 날 좋아라 웃고떠드는 아이들속에도 언제나 내가 있었다.
그 나날 한점의 그늘없이 자라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큰할아버지도,
하지만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마음속그늘만은 털어버릴수 없었다.나의 부모는 온 가족의 앞길을 항상 가로막고있는 장애물때문에 그리고 자식들이 후날에도 억울한 루명을 벗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가슴아픔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많이도 흘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리들은 그 마음속고충을 헤아려주는 은혜로운 손길이 있다는것을 미처 알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우리들의 기억속에서조차 희미해져가던 가문의 애매한 과거사를 품들여 해명해주고 귀중한 정치적생명을 되찾아준것은 우리 당의 품이였다.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더우기 조선국민회에서 한개 부문 사업을 담당한 책임자였다는것을 당에서 보증해주었다는 소식을 한 일군에게서 전해들었을 때 우리 가족은 모두 격정이 북받쳐올라 오열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우리 가문이 받아안은 은정은 비단 그뿐이 아니였다.당에서는 그후에도 큰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친척들의 잘못된 문건을 재료해하여 바로잡으며 자손들의 장래문제까지 맡아 풀어주도록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었다.
온 가문이 한생을 다 바쳐도 보답하지 못할 대해같은 은정을 받아안으며 우리들모두가 눈물속에 어머니당을 우러러 고마움의 큰절을 드리였고 그 어떤 천지풍파가 닥쳐온대도 오직 어머니당만을 굳게 믿고 따를 불같은 맹세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 나날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교단에서 후대교육사업도 하였으며 지금은 체육부문의 설계원으로서 보람찬 삶을 누려가고있다.
이 세상에는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표방하는 정당들이 적지 않다.하지만 슬하의 천만자식모두를 뜨겁게 품어안고 마음속고충까지 하나하나 헤아려주며 대해같은 사랑의 손길로 보살펴주는 어머니당은 오직
하기에 나는 온 세상에 이렇게 웨치고싶다.
이 땅에 생을 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어머니당의 품을 떠나서는 한순간도 살수 없으며 오직 그 품속에서만 참된 삶도, 행복한 미래도 꽃피울수 있다고.
체육성 체육시설설계연구소 설계원 최성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