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믿음을 한생의 재부로 안고
평양시려객운수종합기업소 모란봉뻐스사업소 선동원 천옥금동무는
단발머리처녀시절부터 지금까지 50여년간 당초급선전일군의 영예를 빛내여가고있다
당초급선전일군들은 본신혁명임무를 수행하면서 사회적분공으로 선전선동활동을 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명예나 보수도 바람이 없이 당사상전선을 지켜가며 누구보다 바쁘고 많은 공력을 들이는 이들에게 있어서 제일 큰 힘, 무한대한 정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50여년세월을 한모습으로 살아온 오랜 당초급선전일군인 평양시려객운수종합기업소 모란봉뻐스사업소 수리대대의 천옥금동무의 삶에서 찾아보게 된다.
《당사상사업을 개선강화하여 혁명의 전진동력을 배가해나가는데서 초급선전일군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10여년전 어느날 천옥금동무는 마음이 무거워짐을 금할수 없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이도 많아 이제는 일이 힘에 부치겠는데 집에 들어가 여생을 편히 보내는것이 어떤가 하는 의견을 들었기때문이였다.
솔직히 이런 말은 집에서도 가끔 들어오고있었다.나이가 적지 않은 어머니가 일을 해야 얼마나 하겠는가, 할머니가 선동사업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고.
얼마후 사업소에서는 그의 년로보장문제가 상정되였다.
천옥금동무의 눈앞에는 수십년전의 일이 떠올랐다.
1960년대 그의 가족은 함경남도 허천군의 어느한 산골농장에서 살았다.
천옥금동무가 중학교를 졸업할무렵 농장에서 당세포위원장(당시)사업을 하던
《선동원 리신자동무에 대한 기사가 당보에 실렸더구나.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당의 뜻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양하고
가족이 잠든 깊은 밤에도 자주
며칠후 그는
《이 둘째딸이 당에 충직한 붉은 선동원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여 꿈도 많고 포부도 컸던 천옥금동무는 당의 목소리를 전해가는 영예로운 임무를 삶의 본령으로 간직하고 포전선동길에 나섰다.애젊은 처녀선동원은 농장사람들을 깨우치고 알곡증수에로 불러일으키는데서 불씨가 되였다.여러해동안 외진 농장의 포전들에서, 마을들에서 나어린 선동원의 호소는 진함없이 울려퍼졌다.이 나날 그는 선동원의 호소에 호응해나서는 농장사람들과 그것이 높은 영농실적으로 이어지군 하는것을 자주 목격하며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 하는것을 실체험속에 느끼군 했다.
그러던 1970년대중엽 천옥금동무는 중앙기관에서 일하게 된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올라오게 되였다.
렬차에서 내리는 길로 그들부부는 만수대언덕에 높이 모신
그때 천옥금동무는 이렇게 마음속결의를 다졌다.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도 선동길을 변함없이 이어가며 당에 기쁨을 드리겠습니다.)
남다른 자각과 열의를 안고 그는 평양제1려객자동차사업소(당시)에서 선동원사업을 시작하였다.
욕망은 컸다.하지만 운행길선동의 첫걸음을 뗀 그는 지방의 농장포전과 마을들에서 하던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다는것을 절감하였다.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중앙기관 일군들, 새것에 민감하고 진취적인 청년대학생들…
선동대상은 말그대로 남녀로소였고 매번 환경이 달라지군 하였다.그들모두에게 공감을 줄수 있게 자신을 준비한다는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당에서 당초급선전일군 한사람한사람을 얼마나 중시하고있는가를 스스로 돌이켜보면서 자신을 다잡았다.
그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출발하였다.인민대학습당의 열성독자가 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은 빠짐없이 읽었다.정책박사가 되기 위하여 《로동신문》도 누구보다 먼저 열독하였고 박식가로 자신을 준비하기 위해 애썼으며 방 한칸을 따로 내여 선동준비실로 꾸리고 효과있게 리용했다.남편도 적극적인 방조자가 되여 정치, 문예도서들과 리론잡지들을 적지 않게 구해주었다.
그의 정치의식수준과 선동활동의 실효성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한번은 천옥금동무가 선동활동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진적이 있었다.
그런 몸상태로 일없겠는가고 사람들이 우려하였지만 그는 조용히 이야기했다.
나의 당적량심이 이 선동길에서 물러서는것을 허락한다면 당을 받드는 길에 항상 뒤걸음만 있을것이다.
그는 결연히 일떠섰다.
잡다한 가정사나 여러 애로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군 해도 그의 선동길은 한번도 끊어진적이 없었으며 대중앞에서 울리는 목소리에는 언제나 힘이 실려있었다.
대중을 당정책관철에로 불러일으키고 그들이 공감되면 그것이 곧 천옥금동무의 더없는 기쁨이고 자부심이였다.
이 나날 천옥금동무는 모범선동원으로 성장하였으며 제4차 전국선동원대회에서 토론을 하게 되였다.
연단에서 천옥금동무는 이렇게 결의다졌다.
《당의 믿음을 잊지 않고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선동의 북소리를 높이 울려가겠습니다.》
조선로동당 제8차 사상일군대회에 참가하여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사상공세의 출발진지를 차지하던 때를 비롯하여 지나온 나날을 되새겨보며 천옥금동무는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당조직을 찾아가 선동활동의 길에 여생을 바칠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1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는 변함없는 한모습으로 살고있다.그는 한건한건의 선동문을 준비하는데 많은 품을 들이였다.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을수록 거울앞에서 몸가짐을 바로잡군 했다.구체적으로 짜놓은 일과표대로 생활하면서 자신에 대한 요구성도 보다 높이였다.
육체는 로쇠해도 선동원의 자각과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이른새벽 만수대언덕에서 충성의 결의를 다지는 남다른 일과를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김없이 집행해오고있다.
지난 3월부터 그는 당 제9차대회의 사상과 정신을 해설하고 당결정관철에로 불러일으키는데 중점을 두고 여러 려객로선들에서 운행길선동을 진행하고있다.
나이 일흔이 지난 선동원,
우리는 그가 진행한 선동회수, 그가 마주했던 군중들이 얼마나 많고 그의 선동활동의 실효가 어떤가에 대하여서는 구태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남다르게 흘러온 그의 한생, 오늘도 끝나지 않은 그의 선동길에서 깊이 새겨보게 되는것이 있다.
당의 믿음을 한생의 재부로 소중히 간직한 당초급선전일군만이 로쇠도 변심도 없이 당사상전선을 지켜갈수 있다는것을.
그렇다.당에서 당초급선전일군들을 굳게 믿으며 언제나 정겨운 시선으로 지켜보고있다는 남다른 자각,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보답의 길을 가고갈 강렬한 의지가 있었기에 천옥금동무는 수십년을 참된 선동원의 한모습으로 변함없이 살수 있었고 이 시각도 선동길을 이어가고있다.
본사기자 박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