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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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일 목요일 5면 [사진있음]

마을의 주인들

도시부럽지 않은 생활을 창조해간다

북청군 죽상리를 찾아서


도질령의 굽이굽이를 넘어서니 눈뿌리 아득히 펼쳐진 과수밭이 저 멀리에서 안겨왔다.과수의 고장 북청군에 들어선것이다.차창에는 풍요한 대지와 수려한 산발들이 비껴흘렀지만 우리의 생각은 줄곧 이제 도착하게 될 취재지에 가있었다.

북청군 죽상리,

높고낮은 산발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막은데다 흙보다 돌이 더 많아 척박하기 이를데없던 이 고장에 도시부럽지 않은 새 생활이 꽃펴나고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접한것은 얼마전이였다.중앙이 지방을, 도시가 농촌을 부러워하는 새시대를 펼치려는 당의 숭고한 리상에 의해 일떠선 또 하나의 선경마을을 찾아가는 길이여서 걸음보다 먼저 마음이 앞서달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식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전진시키기 위한 간고한 투쟁행정에서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한 우리 농업근로자들이 부유하고 문명한 사회주의리상향에서 행복한 생활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의지입니다.》

우리가 죽상리에 이른것은 이른아침이였다.

나지막한 언덕에 오붓이 자리잡은 마을의 정경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왔다.

련면히 뻗어간 산발을 배경으로 즐비하게 들어앉은 각양각색의 현대적인 단층과 소층살림집들, 살림집뜨락과 동구길, 휴식터마다에서 푸른 잎새를 한껏 펼친 갖가지 나무들…

수도의 경루동이 통채로 옮겨온듯싶었다.

어찌 이뿐이랴.

방송으로 노래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가 흥겹게 울려나오는 속에 남녀로소모두가 떨쳐나 뜰안을 거둔다, 집주변과 동구길을 쓴다 하며 붐비고있었다.

마을어귀에서 농장경리인 박광훈동무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직 지면에 담자면 멀었습니다.하지만 불과 몇년어간에 고장도 새 고장이 되고 사람들도 새 사람이 되여가고있는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허두를 뗀 일군은 자체의 힘으로 지난해에 탁아소와 분교를 번듯하게 일떠세웠으며 지금은 기술고급중학교건물을 새로 건설하고있다고 자랑하는것이였다.이어 농촌마을을 원림화하기 위해 올해에만도 갖가지 나무와 화초를 많이 심었다고, 이제는 평범한 농장원들에게서도 원림경관이라는 말이 범상하게 흘러나오고있다고 하면서 박광훈동무는 이 모든것이 지난 시기에는 어림도 없었던 일이라고 그루를 박았다.

그럴만도 하였다.몇해전까지만 해도 이 고장 사람들속에서는 《우리야 농촌인데…》, 《농촌마을에서 이만큼만 해도…》라는 낡은 관념이 뿌리깊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언땅처럼 굳어진 이 생각이 갈아엎어지기 시작한것은 당의 은정속에 수백세대의 새 농촌살림집이 일떠선 후부터였다고, 그때부터 죽상리사람들의 생활리듬이 달라졌다고 하면서 박광훈동무는 우리를 19인민반 김철민동무의 집으로 이끌었다.

씨엉씨엉 앞서걷던 경리는 우리에게 꾸리기에 여념이 없는 마을사람들을 가리키며 죽상리에 새 농촌살림집들이 일떠선 후 생겨난 새 풍치이라고, 더우기 농촌위생문화주간을 앞두고 모두가 저렇게 열성이라고 말하였다.그러고보니 매 분기 첫달 첫주가 농촌위생문화주간이며 매달 1일이 농촌위생문화의 날이라는 사실이 상기되였다.

경리의 자랑을 들으며 목적지에 이르니 방안에서 구성진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고있었다.

노래소리 하늘멀리 울리여가니

여기가 락원인줄 알아나 주소

집주인인 직속제1분조 분조장 김철민동무가 부르는 노래였다.노래를 무척 좋아하는것같다고 하자 그는 아담하게 꾸려진 방안을 둘러보며 벙글써 웃었다.

《아시다싶이 우리 북청이야 노래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가 태여난 고장이 아닙니까.특히 우리 죽상리사람들은 그 노래의 3절을 좋아합니다.아마도 저희들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져있기때문인것같습니다.》

그리고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것이였다.

사실 그는 몇해전까지만 해도 집꾸리기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한 가정의 세대주이기 전에 한개 분조의 농사를 책임진 분조장이여서 농사밖에 몰랐다.또 그렇게 하는것이 농사군의 본분을 다하는것이라고만 여기였다.

하지만 마을에 새 농촌살림집이 번듯하게 일떠서고 수십명이나 되는 분조원들모두가 한날한시에 새집의 주인이 된 후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농업근로자들을 새 문명의 주인으로 내세우려는 당의 숭고한 뜻을 새길수록 지난날이 부끄러웠고 새로운 결심이 가슴에 고패쳤다.

하여 농쟁기가 떨어질줄 몰랐던 그의 손에 청소도구가 묻어돌아갔고 짬시간마다 집안팎을 알뜰히 거두었다.농촌위생문화의 날과 농촌위생문화주간이면 분조원들사이에 꾸리기경쟁이 진행된다고, 그 과정에 사람들의 문화수준이 높아지는것이 눈에 띄게 알린다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농촌위생문화의 날과 농촌위생문화주간은 농장마을을 도시처럼 꾸려가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고있다고, 그래서 누구나 이날을 기다린다고.

소박한 그의 말에서 우리는 제손으로 도시부럽지 않은 생활을 창조해가려는 죽상리사람들의 지향을 느낄수 있었다.

이윽고 우리는 다수확농장원인 전봉실동무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저는 궁궐같은 이 집에서 살 자격이 없는 녀자였습니다.》

그는 몇해전까지만 해도 제집살림밖에 몰랐다고 한다.벌방지대인 안악군에서 이곳으로 시집온 후 시일이 흐를수록 그에게는 사방 둘러보아야 산밖에 보이지 않는 여기서는 적당히 꾸리고 살아가는것도 괜찮다는 그릇된 관념이 점차 자리잡기 시작했다.그러다보니 생활과 현실을 대하는 안목도 점점 좁아졌고 나중에는 제집뜨락, 제집살림밖에 모르는 리기주의에 물젖게 되였다.가정수입을 늘이기 위해 여러가지 잡다한 일감들을 벌려놓고 동분서주하였는가 하면 어쩌다 포전에 나와서도 어떻게든 짬시간을 내서 제볼장을 볼 궁리에만 옴해있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농사일보다 제집일에 극성이였던 그에게도 새 농촌살림집을 남들과 꼭같이 배정해주었다.새집에 보금자리를 펴던 그날 그는 받아안은 행복이 너무도 꿈만 같아 잠을 이룰수 없었다고 한다.그럴수록 나라의 쌀독을 가득 채우고 가정과 마을을 도시부럽지 않게 훌륭히 꾸려갈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그때부터 그는 낮에는 포전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하루작업이 끝난 후에는 농장의 면모를 일신시키기 위한 일에 선참으로 어깨를 들이밀었다.살림집을 알뜰히 관리하는데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였으며 이 과정에 마을에서 제일먼저 사회주의생활문화모범가정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우리는 1인민반 김용봉로인의 집에도 들려보았다.사과나무, 감나무를 비롯한 10여그루의 과일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뜨락에 들어서니 로인이 원림록화와 관련한 도서를 열성스레 읽고있었다.

《농촌마을을 도시화하라는것이 당의 뜻이 아닙니까.이제 머지않아 우리 마을도 도시처럼 변모되겠는데 원림록화에 좋은 식물들에 대해 더 잘 알아두려고 합니다.》

그 열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는 우리에게 경리는 마을의 휴식터관리를 도맡아하여 사람들속에서 《공원관리원》으로 불리우는 로인이라고 알려주었다.

로인이 스스로 《공원관리원》이 된데는 사연이 있었다.

몇해전 그가 년로보장을 받은 후 북변의 한 도시에서 살고있는 맏아들이 집에 찾아왔다.이제부터는 자기가 부모를 모시겠다고, 군사복무를 하느라 늘 슬하를 떠나 살았는데 자식된 도리를 해야겠다고 하는것이였다.수십년을 살아온 고장을 훌쩍 떠난다는것이 도리가 아닌것만 같아 잠시 머뭇거렸지만 아들의 부탁도 절절하고 또 여생을 도시에서 편안히 보내고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그는 승낙하였다.하여 그는 안해와 함께 죽상리를 조용히 떠나갔다.

그로부터 얼마후 그는 죽상리에서 새 농촌살림집건설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었다.로인은 한번 가서 마을의 변천을 제눈으로 보고싶은 충동을 어쩔수 없었다.그리하여 안해와 함께 다시 죽상리를 찾아왔던 그는 마을어구에서부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여러번 흘렀지만 생활환경과 방식에서 별로 달라진것이 없었던 마을이 몰라보게 변모되고있었던것이다.죽상리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그였지만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였다.

여기가 과연 돌이 하도 많아 돌상리로도 불리우던 고장이 옳은가.고향으로 돌아온 한 제대병사가 눈을 감고도 자기 집을 찾아갔다는 감나무집은 어디인가.

아무리 눈을 비벼 살펴보아도 옛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리일군이 다가왔다.

《이 고장을 잊지 못해 다시 왔구만요.이제 아바이에게도 새집이 차례질겁니다.》

리일군의 말에 그는 부끄러웠다.실상은 도시생활이 그리워 제고장을 떠났던지라 머리를 들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달후 이곳에 새집들이경사가 있었다.죽상리가 생겨 처음 보는 경사의 날에 그도 새 살림집을 배정받았다.그는 덩실한 새집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농업근로자들에게 문명한 생활을 마련해주는 고마운 제도에서 살면서 땀이야 왜 못바치랴.

이렇게 되여 그는 마을의 풍치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공원관리원》이 되였던것이다.

문명한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가는 곳마다 만나볼수 있었다.

진정 들리는 집마다 웃음소리요, 넘치는 자랑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어느덧 저녁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했다.어디선가 노래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의 선률이 바람결에 실리여 귀전에 들려왔다.

보람찬 하루일을 마친 농장원들이 휴식터에 둘러앉아 부르는 노래소리를 듣느라니 헤여지면서 박광훈동무가 하던 말이 되새겨졌다.

《우리 죽상리사람들의 어벌이 얼마나 커졌는지 아십니까.기술고급중학교건설을 끝내고는 공공건물을 번듯하게 일떠세우자고 합니다.》

새겨볼수록 우리의 가슴은 뜨거웠다.죽상리에 대한 취재길에서 목격했던 화폭들이 정답게 어려왔다.

우리 농업근로자들이 얼마나 몰라보게 성장하고있는가.자기 손으로 도시부럽지 않은 생활을 창조해가는 이런 주인들이 가꾸는 땅에 어찌 황금이삭 주렁지지 않을수 있으며 사회주의리상촌이 펼쳐지지 않겠는가.

산천도 사람도 다같이 아름답게 변모되여가는 죽상리, 돌아볼수록 깊은 의미를 새겨주고 우리 당정책의 생활력을 가슴뿌듯이 느끼게 하는 고장이였다.

마을을 떠나면서 우리는 취재수첩에 이런 글을 새기였다.

죽상리의 진짜자랑은 당과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깊이 새기고 자기의 손, 자기의 힘으로 농촌의 도시화, 문명화, 선진화를 기어이 실현하려는 농업근로자들의 불같은 향토애이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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