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깊은 《삼천리》연필

 

조국해방의 날을 맞을 때면 나는 첫 의정과 《삼천리》연필에 대한 생각을 하군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해방후 우리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첫 의정으로 연필문제를 토의하고 연필을 생산하는것으로부터 새 조국의 경제건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1차회의에서 연필문제를 상정하시였다는 소식에 접하고 누구보다 커다란 충격과 격정으로 가슴설레인 한 기업가가 있었다.해방후 평양시에 자그마한 연필공장을 차려놓고 경영하던 나의 아버지 송대관이였다.

바로 이 력사적인 회의가 있기 얼마전 나의 아버지는 공장을 찾아오신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였다.

주체35(1946)년 2월 3일, 공장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의 아버지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며 그동안 연필문제때문에 은근히 걱정을 하였는데 동무들이 연필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와서 이렇게 찾아왔다고, 참으로 훌륭한 일을 시작했다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사실 그때 공장은 말이 공장이지 살림집과 잇닿은 자그마한 건물에 기계대패 2대와 송풍기 1대를 놓은 보잘것없는 작업장이였다.거기서 8명의 로동자들이 흑연과 석탄가루를 날리며 일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대패로 연필대의 각을 내고있는 로동자들에게 수고한다고 하시며 그들의 손을 허물없이 잡아주시고 일이 힘들지 않는가, 하루에 연필을 얼마나 생산하는가를 알아보시였다.

이날 여러가지 색갈의 연필이 무드기 쌓인 가운데서 한자루를 집어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삼천리라는 자호를 살펴보시며 연필이름이 좋다고, 정말 조선맛이 난다고 말씀하시였다.손수 연필을 깎아보시고 수첩에 써보기까지 하시며 아직 부족점이 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조선사람이 제힘으로 처음 만든 연필인데 이만하면 성공한것이라고 하시였으며 떠나실 때에는 속담에도 있는것처럼 첫술에 배부르겠는가, 이제 나라에서 큰 건물도 해결해주고 수송문제도 풀어주며 채벌림도 떼주겠으니 좋은 연필을 많이 만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삼천리》연필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선참으로 보고드리신분이 어리신 아드님과 함께 소문도 없이 공장을 다녀가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이시라는것을 전혀 알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연필공장에 화물자동차를 보내주시면서 한 일군에게 새 자동차를 구하느라고 시일이 좀 걸렸는데 평양연필공장 주인에게 그래서 늦어졌다는것을 잘 이야기하라고, 화물자동차 한대가 연필공장주인의 기업활동에서 큰것은 못되겠지만 성의로 알고 받으라고 이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개인기업가였던 나의 아버지의 한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애국의 한생으로 줄달음치게 되였으며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오늘도 영생하는 삶을 누리고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송대관동무는 해방후에 많은 일을 한 애국자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으며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대대로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고있는 애국자가정이라고 치하해주시였다.

참으로 어버이수령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신 조국해방의 날이 있어 우리 가정만이 아닌 온 나라 인민이 참다운 삶을 누릴수 있었고 애국자라는 값높은 부름과 함께 한생을 빛내여올수 있은것이다.

하기에 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군 한다.

민족의 운명도, 개인의 운명도 위대한 수령을 모실 때만이 빛날수 있다고, 우리의 운명이고 미래이신 경애하는 원수님을 충성으로 높이 받들어모셔야 한다고.

평양안경상점 경리 송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