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13. 《로동신문》 4면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는 온 나라에 널리 알려진 굴지의 만화영화창작기지이다.
이곳에서 창작한 수많은 만화영화들은 어린이들만이 아닌 각계층 인민들의 호평을 받으면서 생활의 친근한 길동무로 되고있으며 그 독창성과 매력, 높은 형상수준과 빠른 창작속도로 하여 세상사람들을 놀래우고있다.바로 이러한 관록있는 창작집단에서 사회주의애국공로자가 배출되였다.그가 바로 제1창작단 단장 조명덕동무이다.
《자기 일터, 자기 초소를 사랑하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유명무명의 애국자들에 의하여 나라가 부강해지고 사회주의락원이 일떠서게 되는것입니다.》
지난 40여년간 조명덕동무는 인민들의 사랑받는 수백편의 만화영화를 창작, 지도하여 우리의 만화영화제작기술과 실력을 남김없이 떨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모든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쳐 유능한 창작가후비들을 키우는 길에 자신을 밑거름으로 깡그리 바치였다.
만화영화와 더불어 흘러온 그의 생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인민의 기쁨을 더해주고 집단의 전진을 떠밀어주는데 이바지되였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어머니당이 내세워주고 조국이 기억하는 참된 애국자의 인생으로 빛난다는 귀중한 진리를 새겨주고있다.
인민들이, 아이들이 좋아하는가
《소년장수》는 이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고 즐겨보는 가장 인기있는 만화영화들중의 하나이다.
조명덕동무는 만화영화 《소년장수》 1부가 나올 때부터 100부를 완성할 때까지 그 창작과 지도에 재능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쳐왔다.그 나날은 단순히 인민들과 후대들의 사랑과 기대속에 창작지도일군으로서의 보람과 희열을 느낀 날과 달만이 아니였다.
《지금도 저는
주체103(2014)년 11월 26일, 그날 조명덕동무는 배경실에서 창작가들과 함께 만화영화 《소년장수》에 나오는 중심인물의 원화를 펼쳐놓고 토론을 진행하고있었다.
그런데 글쎄 꿈결에도 뵙고싶던
너무도 뜻밖이여서 인사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고있는데
그때까지만 하여도 조명덕동무를 비롯한 창작가들은 그이께서 만화영화에 나오는 하나의 인물형상을 두고 왜 그리도 기뻐하시는지 다는 알수 없었다.촬영소의 책임일군으로부터
그 어디에 가시든, 그 무엇을 보시든 늘 인민들이 좋아하는가 먼저 물어보시는
만화영화 《소년장수》의 구체적인 창작방향까지 가르쳐주시며 새로운 활무대를 펼쳐주신
온 나라 일을 보살피시는 그처럼 분망하신 속에서도 그들이 만들어올린 여러부의 《소년장수》 련속편들을 몸소 보아주신
우리 아이들과 인민들속에 친숙해진 쇠메의 모습이 낯설어보이지 않도록 수염을 형상하는 문제까지도 세심히 지도해주신
그날 조명덕동무는 창작단성원들앞에서 격동된 자기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동무들, 우리가 형상하는 하나하나의 화면에 인민에 대한 자세와 립장, 당을 받드는 우리의 충성심이 비낀다는것을 순간도 잊지 맙시다.》
지금도 작가 김화성동무가 두고두고 외우는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그가 새로 창작하는 만화영화문학대본에 대한 의견을 받기 위해 조명덕동무를 찾아간적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퍼그나 지나도록 그는 대본을 놓을줄 몰랐다.2시간동안 고심하여 그가 고쳐놓은 대사는 불과 두개뿐이였다.김화성동무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이런 부차적인물의 대사를 놓고 그렇게도 고민했습니까.》
조명덕단장은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만화영화에서는 부차적인물이 있을수 있어도 그 만화영화를 만드는 우리에겐 부차적일이란 있을수 없소.》
바로 이런 결곡한 창작태도를 지니였기에 조명덕동무는 때로는 거리에서, 뻐스에서 《소년장수》를 본 철부지아이들의 역인물에 대한 단방치기평가를 그 어떤 전문가들의 심의 못지 않게 심각히 받아들였고 그런 날이면 다음작품의 장면들을 밤새워 수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중앙TV에서 새로 나온 《소년장수》를 상영하는 시간이 되면 그는 만사를 제치고 평양역으로 달려가군 하였다.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솔직하고 엄격한 심사자들인 인민들과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합평회시간이기도 하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전광판앞에 모여 《소년장수》를 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그는 놀랐다.긴장과 경탄, 호기심이 엇갈리는 속에 어느덧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은 흩어져갔지만 그는 이윽토록 자리를 뜰수 없었다.
정말 재미있다고, 예고편을 보니 다음부가 더 기다려진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냥 귀전에 울리여왔다.조명덕동무는 저도 모르게 품속에서 보풀이 인 편지 한장을 꺼내들었다.
《만화영화 〈소년장수〉를 만든 아저씨, 아지미들.79부를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고맙습니다.앞으로 100부까지 모두 이렇게 재미있게 만들어주세요.중구역 창전소학교 4학년 3반 학생일동》
이제는 외우고도 남았건만 소박한 그 편지를 볼 때마다 조명덕동무는 가슴이 뿌듯해지고 이름 못할 긍지로 새힘이 막 넘쳐났다.그는 또다시 희열에 넘쳐 창작에 달라붙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픔을 감추고 일하던 그는 끝내 쓰러졌다.이제라도 병원으로 가자고 안타까이 말하는 연출실장 김진혁동무에게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난 아직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자면 할 일이 많은 사람이요.》
조명덕동무의
부모도 알지 못했던 자식의 재능의 싹을 남먼저 찾아준 사람은 학생소년회관 미술소조선생이였다.몇해후에 조명덕동무는 당의 은정깊은 조치에 따라 평안북도예술전문학교(당시)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그가 예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떠나던 날 그의
《머슴군의 아들을 미술가로 키워 평양에까지 불러준 당의 은덕에 한생을 다해 보답하거라.》
만화영화창작을 시작한지 몇달이 흘렀다.
《강선의 저녁노을》과 같은 명작을 그리는 미술가가 되고싶었던 그의 가슴속에서는 아이들의 그림이나 그려서야 언제 나라의 은덕에 보답할수 있을가 하는 걱정이 점점 더 커만 갔다.바로 그러한 때 한 전쟁로병연출가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의 인생을 결정하게 하였다.
《우리 촬영소는 조국해방전쟁이 승리한지 4년만에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촬영소를 두차례나 찾으시여
설비로부터 후비육성, 종업원들의 살림집건설에 이르기까지 영화창작과정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일일이 다 풀어주신
《우리 아이들이 정다운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또 하나의 교과서처럼 보고 새기는 만화영화들을 잘 만드는것은 바로 당에서 우리 창작가들에게 준 과업이요.》
어린시절 례사롭게 보아왔던 그 만화영화 한편한편에
그 불같은 충성과 애국의 마음 안고 쉬임없이 한모습으로 줄달음쳐왔기에 조명덕동무와 창작집단은 만화영화 《소년장수》 련속편에 대한 창작을 1년이나 훨씬 앞당겨 끝내는데 기여하고 우리 당에 기쁨의 보고를 드릴수 있었다.만화영화 《소년장수》 100부가 온 나라에 방영되던 날, 집집의 창가마다에서 흘러넘치는 우리 인민들과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조명덕동무는 끝없는 행복에 겨워 당중앙창가를 우러러 삼가 아뢰였다.
어머니당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이 담긴 금반지를 받아안은 날 만화영화와 함께 흘러온 생을 감회깊이 돌이켜보며 조명덕동무는 이렇게 심장의 고백을 터쳤다.
《우리가 창작한 만화영화들의 자막에는 수많은 창작가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하지만 그 맨 첫자리에
인재집단의 밑뿌리
3중3대혁명붉은기단위인 제1창작단에는 자랑이 많다.창작실적에서도 체육경기에서도 합창경연에서도 제1창작단은 언제나 앞자리에 있다.그중에서도 누구나 제일 부러워하는것은 창작단의 오늘과 래일을 떠메고나갈 창작가후비력량이 든든한것이다.
촬영소의 손꼽히는 인재중의 한사람인 30대의 쟁쟁한 연출가 성운남동무는 사실 20여년전까지만 하여도 평범한 채색원이였다.그가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원도미술가, 책임미술가로 되였을 때 사람들은 그의 빠른 성장을 두고 놀랐다.그러나 그의 걸음걸음을 이끌어준 조명덕동무는 만족을 몰랐다.그는 또다시 성운남동무를 평양연극영화대학으로 떠밀어보내였다.
알아야 더 높이 날수 있다고, 창작단의 래일을 위해 더 힘껏 배우라고 부탁하던 그의 진심어린 목소리를 성운남동무는 오늘도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만화영화라고 하여 헐하게 만들수 있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고, 만화영화일수록 각계층 사람들의 심리세계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하며 진지하게 탐구하여 형상수단과 수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현지실습까지 함께 다니며 조명덕동무가 그를 위해 기울인 노력은 얼마나 헌신적이였던가.
완공된 평양육아원을 찾으신 날 식당 앞벽면에 부각하여 붙인 여러가지 그림을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 미술가들이 그렸다는데 전문기관의 미술가들이 그렸다는것이 알린다고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하고 창작단에 금방 배치된 김철현동무에게 대담하게 만화영화 《령리한 너구리》 제65부에 대한 연출을 맡길것을 당조직에 제기한 사람도 다름아닌 조명덕동무였다.
온 하루를 꼬바기 바쳐 조명덕동무가 거의나 다시 쓰다싶이 한 연출대본을 받아안은 김철현동무의 마음은 정말 송구스러웠다.
《단장동지, 경험도 없는 제가 마지막까지 작품을 완성할것같습니까?》
동요하는 그의 눈빛을 띄여본 조명덕동무는 한동안 창문밖을 바라보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무도 우리 창작단의 오랜 연출가인 리철동무가 창작한 만화영화 《소년장수》 11부에서 나오는 기막힌 명장면을 기억하고있을것이다.그때 문학대본에는 호비가 가까스로 열쇠를 손에 잡는다는 단 한줄만이 씌여져있었을뿐이다.그러나 그는 손으로도 겨우 잡을 그 열쇠를 더 멀리 가져다놓고 손이 아니라 발로 열쇠를 끌어당기는 기발한 착상으로 사람들이 두고두고 외우는 명장면을 만들어놓았다.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그 한장면을 위해 며칠을 고심했는지, 한밤중에 문뜩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이것이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온 집안식구를 깨웠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있었다.동무들은 바로 이런 전세대 창작가들의 창조정신, 창작기풍을 따라배워야 한다.…
인민의 웃음을 꽃피워 당에 기쁨을 드리는것, 이것은 우리 창작단의 바통이며 그 바통을 바로 동무들과 같은 새세대들이 이어가야 한다고 간곡히 당부하는 조명덕동무의 이야기는 주저하던 김철현동무의 가슴을 새로운 사명감으로 끓게 하였다.
마침내 만화영화가 훌륭히 완성되였을 때 자기보다 더 좋아하며 흥분을 금치 못하는 조명덕동무에게 김철현동무는 물었다.그렇게도 기쁜가고.
《내 작품이, 내 자식이 태여난것처럼 정말 기쁘오.아마 여기에 내가 사는 보람이 있는것같소.》
조명덕동무는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언제인가 진행된 목요기량발표회때였다.
신인미술가 리충미동무가 그린 소묘작품을 놓고 합평회가 진행되고있는 원도2실로 조명덕동무가 조용히 들어섰다.
소묘작품을 들여다보던 조명덕동무는 짐승의 근육도 뼈생김새에 따라 그려야 더 생동해질수 있다고 하면서 직접 펜을 들고 단번에 수정해놓았다.
자신감에 넘치는 그의 유연한 손놀림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하지만 그들은 조명덕단장이 60이 지난 그 나이에도 짬을 내여 쉴새없이 습작을 하군 한다는것을 다는 알수 없었다.더우기 하나의 대사수정을 위해 소설책들은 물론 각 분야의 과학기술도서들까지 본다는것은 더욱 모르고있었다.단장인 나의 손이 굳어지면 우리 창작단 미술가들의 손이 무디여지게 되고 나의 실력에 공백이 생긴다면 창작단에서 내놓는 만화영화들이 인민들과 멀어지게 된다는것이 조명덕동무의 지론이다.
오늘 제1창작단이 촬영소에서 실력있고 전망이 기대되는 청춘집단으로 불리우고있는것은 창작가들의 평균나이가 젊었기때문만이 아니다.
흔히 청춘산업이라고 불리우는 만화영화는 집단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3차원만화영화 《악마를 이긴 억쇠》가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킬수 있은것은 결코 집단주의정신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그들이 대담하게 새 작품창작에 뛰여들었을 때 사실 창작집단에 뛰여난 기술력량이 준비되여있은것은 아니였다.하지만 창작집단은 주저하지 않았다.우리 나라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만화영화대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신
무궁무진한 집단의 힘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전진하며 인민의 웃음을 꽃피워 나날이 새로와지는 그들을 어찌 청춘집단이라고 부르지 않을수 있으랴.
오직 당과 인민을 위하여 자기의 숭고한 사명을 다해가는 인재집단의 밑뿌리가 되여 만화영화의 래일을 떠메고나갈 기둥감들을 굳건히 키운 조명덕동무, 바로 거기에 그의 또 하나의 공적이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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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편의 만화영화를 창작지도하였지만 조명덕동무의 이름이 자막에 새겨진적은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 인민과 아이들의 기쁨과 웃음속에, 어머니당의 뜻을 받들어 조선4.26만화영화촬영소 제1창작단이 내놓은 그 무수한 만화영화들에 그의 값높은 애국과 충성, 량심과 재능은 보석처럼 빛나고있다.
우리 당은 바로 이런 사람을 사회주의애국공로자로 값높이 내세워주었다.
그의 빛나는 인생은 이렇게 말하고있다.
자기만을 위한 삶은 흔적없이 사라지지만 인민을 위해, 집단을 위해 바친 삶은 당의 기억속에 영원하다고.
글 및 사진 본사기자 김성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