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13. 《로동신문》 3면
어느한 공장에서 있은 일이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설비보수를 끝낼 방도를 모색하던 일군들은 공장의 젊은 기술자로부터 기발한 제기를 받게 되였다.그가 내놓은 방안대로 하면 많은 로력과 자재,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설비보수를 질적으로 끝낼수 있었다.
문제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해본적이 없는 방법이라는데 있었다.기술적으로는 완벽하였지만 실천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알수 없었다.
새로운 방안의 실현가능성을 론의하는 장소에서 초급당일군은 한가지 스쳐지날수 없는 문제를 간파하게 되였다.
일부 일군들이 신중성을 념불처럼 외우면서 문제토의에 매우 소극적으로 림하는것이였다.겉보기에는 매우 책임적이고 진중한것처럼 보였지만 그 리면에는 혹 있을지 모르는 실패의 책임을 미리부터 모면하려는 무책임성이 깔려있었던것이다.
당조직의 지도밑에 설비보수가 성과적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일군들과 종업원들은 참으로 큰 교훈을 찾게 되였다.
하다면 이런 일군들이 우리곁에 더는 없다고 장담할수 있는가.
아래에서 제기하는 대담한 기술혁신안을 놓고 왼새끼를 꼬는 사람, 좀더 완성해가지고 오라고 등을 떠미는 사람, 지금은 바쁜데 후에 깐깐히 따져보자고 하고는 감감 무소식인 사람,
이런 일군들의 공통적인 점은 다름아닌 극도의 보신주의와 무책임성이다.혁명의 주인, 단위발전의 주인이라는 자각이 꼬물만큼도 없는 사람에게서 신중성이란 교묘하게 위장된 무책임성일따름이다.
국가부흥의 활로를 열어나가기 위한 오늘의 투쟁은 그 어느때보다 대담하고 진취적인 사업기풍과 일본새를 절실히 요구하고있다.
시대는 모든 일군들에게 묻고있다.
실지 책임지려는 립장에서 발휘되는 신중성인가, 보신과 무책임성에서 나온 《신중성》인가.
본사기자 리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