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19. 《로동신문》 3면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는 우리 인민이 발휘한 집단적영웅주의의 뚜렷한 표현입니다.》
지금도 천리마시대에 산 사람들은 남녀로소모두가 천리마를 타자고 윽윽하며 저저마다 새 기록을 세우기 위해 뛰고 또 뛰던 그 나날을 감회깊이 추억하고있다.
우리 식의 독창적인 사회주의경제지도관리체계인 대안의 사업체계가 창조된 대안전기공장(당시)은 주체52(1963)년 4월 4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천리마공장의 영예를 지니였다.
천리마운동의 불길은 농업부문에서도 거세차게 타올랐다.
첫 천리마농장의 영예를 지닌 강서구역 청산농장을 돌아본 어느한 나라의 기자는 자기의 글에 이렇게 썼다.
《…청산리의 12개 작업반은 모두 천리마작업반칭호를 받았고 그중 9개 작업반은 2중천리마작업반이며 그후 4년간의 실적으로 천리마영예상을 받았으며 1967년에는 전국에서 제일 선참으로 천리마농장의 칭호를 받았다.》
당에 충직한 문예전사들은 력사적인 당 제4차대회를 맞으며 천리마시대를 반영한 근 250편의 소설과 시를 내놓았고 미술가들도 천리마시대의 영웅서사시적화폭들을 생동하게 담은 수많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주체49(1960)년 12월에는 김책공업대학 전기공학부 약전과 4학년 7반(당시)의 학생들이 천리마학급의 영예를 지닌것으로 하여, 주체53(1964)년 2월에는 룡강군의 애원중학교(당시) 학생들이 어린 나이에 천리마기발을 수여받은것으로 하여 온 나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온 나라의 어느곳에서나 거세차게 일어번졌던 천리마운동의 불길이였다.
누구나 공산주의적으로 일하며 배우고 생활하는것을 삶의 신조로 삼고
천리마기수가 되는것을 더없는 긍지와 영예로,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는것을 더없는 수치로 여기며 한사람같이 분발해나섰기에 이 땅 그 어디에서나 천리마의 이름과 함께 불리우는 기수들과 단위들이 수없이 배출될수 있었고 우리 나라는 천리마조선으로 그 위용을 만방에 떨치게 된것 아니랴.
하기에 천리마동상에 형상된 두명의 기수들은 우리 공화국의 75성상의 발전행로에 가장 빛나는 페지를 아로새기였던 우리 전세대들의 전인민적인 군상으로 그리도 높이 솟아 빛나고있는것이다.
김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