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일요일  
로동신문
우리 국가의 발전행로에 뚜렷한 자욱을 새긴 충신, 애국자들
혁명문학건설에 이바지한 재능있는 작가
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천세봉선생

2023.8.21. 《로동신문》 3면


우리 공화국의 75년력사에는 일찌기 위대한 장군님께서 정치적안목이 높고 생활체험이 풍부한 재능있는 작가라고 내세워주신 천세봉선생의 이름도 뚜렷이 새겨져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새세대들도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하였던 전세대들처럼 한생을 빛나게 살도록 교양하여야 합니다.》

해방전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난 천세봉선생은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달리 강렬했지만 머슴살이를 하며 쓰라린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라가 해방되여 따사로운 태양의 품속에 안겨서야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된 그는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펼치고 장막희곡 《고향의 인상》을 내놓은데 이어 1960년대까지 많은 농촌생활주제의 소설들을 창작하였다.

천세봉선생이 그렇듯 인민들 누구나 잊지 못해하는 훌륭한 명작들을 많이 창작할수 있은것은 당에 대한 충실성이 누구보다 뜨거웠기때문이다.

장편소설 《석개울의 새봄》창작과정만 놓고보아도 그렇다.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농업협동화방침을 받아안자마자 소설창작에 달라붙어 온 나라의 농업협동화가 한창 진행되고있던 벅찬 시기에 들끓는 시대의 뜨거운 숨결을 생동하게 소설에 담았다.그리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예술영화 《이 세상 끝까지》를 보시고 태성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을 쓸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을 때에도 짧은 기간에 장편소설 《축원》을 훌륭히 창작하여 당에 기쁨을 드리였다.

또한 그는 혁명적대작을 많이 창작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심장깊이 새겨안고 지난날 주로 농민주제의 작품만을 취급하던 집필방식에서 대담하게 벗어나 혁명가들의 생활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그것을 작품에 담기 위해 피타게 노력하였다.하여 그는 총서 《불멸의 력사》중 여러편의 혁명소설들을 기념비적명작으로 훌륭히 완성하여 혁명문학발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정책에 민감하고 충실한 그가 어버이수령님의 위대성을 감명깊게 구가할수 있도록 걸음걸음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면서 그가 건강하여 맡은 일을 더 잘해나가도록 온갖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하기에 그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 쓴 글에서 자신이 창작생활을 시작한 때로부터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으나 오늘에야 진실로 창작의 청춘기를 맞이하고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환희에 넘쳐 젊음과 행복을 이야기하게 된데는 자기를 오늘과 같은 청춘기의 작가로 이끌어주신 영명하신 스승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은덕이 있었기때문이라고 격조높이 토로하였다.

이렇듯 위대한 당의 은혜로운 손길아래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으로 자라난 그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던 나날에도 혁명가를 그리는 작가는 혁명가의 높이를 체득하고 펜끝에서 떨어지는 잉크방울을 자기의 피방울로, 혁명가의 피방울로 여겨야 한다고 늘 외우면서 새세대 작가들을 수령의 사상과 령도에 충실한 혁명가로 키우기 위하여 애썼다.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는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여러 충신, 애국자들과 함께 천세봉선생을 잊을수 없는 혁명동지로 높이 불러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위대한 사랑과 더불어 천세봉선생은 오늘도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의 모습으로 살아있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