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9월 13일 금요일  
로동신문
공민증을 받아안은 때로부터 흘러온 참된 삶의 63년

2023.9.20. 《로동신문》 4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공화국의 품속에서 우리 인민이 누리는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존엄높고 보람차고 행복한 참다운 인간생활입니다.》

내 나이 올해에 여든이다.하지만 나는 나의 진짜나이는 63살이라고 이야기하군 한다.그것은 바로 나의 참된 삶이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긴 63년전 그날부터 시작되였기때문이다.

고마운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면 내가 어떻게 인민과학자 후보원사 교수 박사로 생을 빛내일수 있겠는가.

나의 어린시절은 일본땅에서 흘러갔다.

소작지로 받은 자그마한 뙈기밭에 온 식구가 명줄을 걸고 살아가는 나의 가정에 그림자처럼 뒤따른것은 민족적차별과 가난이였다.그런 속에서도 부모님들은 푼전을 쪼개가며 형님과 나를 학교에 보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나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거름달구지를 끌었고 소젖을 팔기 위해 이집저집 다니다가 등교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학교로 뛰여가군 하였다.그러다나니 일본인학생들은 나에게서 거름내가 난다고 놀려댔고 알고싶은 문제가 있어 교원들을 찾아가면 그들도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를 피했다.

돈이 모든것을 지배하고 내가 아니면 남이라는 관념이 골수에 배긴 너절한자들의 차거운 눈빛만이 배회하는 일본땅에서는 아무리 실력과 재능이 있다고 해도 가난뱅이라는 천대와 멸시를 모면할수 없었다.늘 어두운 나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각던 끝에 나를 도시에 있는 조선학교로 떠나보냈다.하여 나는 일본당국에서 경영하는 어느한 의학대학에 다니는 형님과 함께 자그마한 하숙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형님은 대학적으로 실력이 높은 학생으로 공인되여있었지만 늘 학비단련에 시달렸다.집에서 보내주는 얼마 안되는 돈만으로는 형님의 학비는커녕 우리들의 생활도 유지하기 힘들었던것이다.그러다나니 우리 형제는 공부를 끝내고 돌아와서는 갖가지 일거리들을 맡아안고 늘 바쁘게 돌아쳤다.

늘 학비때문에 고민하는 형님을 보면서 나는 차츰 희망을 포기하게 되였다.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형님처럼 의학대학에 가려는 꿈을 안고있었다.그러나 형님을 대학공부시키기 위해 별의별 고생을 다 하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형님 하나도 공부시키기 어려운 집안에서 나까지 어떻게 대학에 보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의 꿈은 도저히 이룰수 없는것임을 점차 의식하게 되였다.

정녕코 희망을 버려야 하는가 하는 절망감으로 몸부림치던 나의 귀전에 문득 어버이수령님께서 귀국의 배길을 열어주셨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세워주신 인민이 주인된 나라, 사회주의시책속에 모두가 부럼없이 사는 생활, 화목한 대가정에 공기처럼 흐르는 사랑과 정, 온 나라 아이들이 마음껏 배우며 꿈을 꽃피우는 사회주의조국…

나는 결심했다.가자, 조국으로! 그러면 나도 의학공부를 마음껏 할수 있다.

나의 결심을 알게 된 형님은 밤중으로 나를 이끌고 집으로 갔다.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았고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이 슬하에서 떠난다는 생각에 그냥 눈물만 흘리였다.비록 사랑하는 혈육들사이의 리별은 고통스러웠지만 그길에서만 자식이 희망을 꽃피울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기에 부모님들은 나의 결심을 지지해주었다.

하여 나는 17살에 공화국기 하나만을 품에 안은채 홀로 귀국의 배길에 올랐다.

조국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이지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배울 걱정이 조금도 없는 꿈만 같은 나날이였다.그중에서도 처음으로 공민증을 받아안던 그날의 격정과 환희를 오늘까지도 잊을수 없다.

얼마나 기다리고기다리던 순간인가.공민증과 더불어 나는 그처럼 소원하던 배움의 권리, 참된 삶의 권리를 당당히 누릴수 있게 되였다.

나는 공민증을 소중히 품어안고 부모형제들이 있는 머나먼 이국의 하늘가를 바라보며 눈물속에 아뢰이였다.나는 공화국공민이라고, 이제는 그처럼 소원하던 의학대학에 가게 되였다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얼마나 뜨거운 사랑이 나를 품어안고있는줄 다 알수 없었다.나라에서는 내가 조국에 혈육이 하나도 없는것을 고려하여 학용품은 물론이고 장학금도 남보다 더 많이 안겨주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희망대로 의학자가 되도록 하여주었다.나를 위해 기울이는 동지들의 사랑과 정은 또 얼마나 뜨거웠던가.명절날이면 부모형제를 대신하여 교원들과 동무들이 저마다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이끌었고 새 가정을 이룰 때에는 모두가 떨쳐나 결혼상은 물론 가구까지 일식으로 마련해주었다.

정녕 나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조국은 따뜻한 집이였고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다 친형제, 친혈육이였다.

하기에 나는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하여 우리 집에서 달덩이같은 손자, 손녀를 품에 안고 기쁨을 금치 못해하는 어머니에게 나의 모든 행복과 기쁨의 상징과도 같은, 그래서 늘 가슴속에 품어안고 때없이 쓸어보군 하던 공민증을 제일선참 보여주었다.

한생토록 이역에서 농사일에 시달려온 북두갈구리같은 손으로 공민증을 어루쓸던 어머니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말하였다.

《자본주의일본땅에서 가난과 서러움에 지지리도 짓눌렸던 네가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 떳떳이 사는걸 보니 한이 없구나.》

그렇다.조국의 품에서 나는 분명 새 모습으로 태여났다.

인민과학자, 후보원사, 교수, 박사…

공화국의 품에 안겨 공민증에 처음으로 새겨졌던 나의 이름은 이렇게 누구나 부러워하는 증서들에 하나둘 새겨지게 되였다.그 나날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절세위인들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으며 미래과학자거리 준공식때에는 과학자, 교육자들을 대표하여 준공테프를 끊는 꿈같은 행복도 지니게 되였다.나의 세 자식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학위학직소유자로 자라났다.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 흘러온 지난 63년세월 나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자신을 바쳐가는 아름다운 인간들의 소행을 수많이 목격하면서 공민의 권리는 향유에 있는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헌신에 있음을 자각하고 적은 힘이나마 조국의 부강번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전국원군미풍열성자대회에 참가하는 영광도 지니게 되였다.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생일상을 받아안던 그날 나는 밤깊도록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열손가락이 모지라지도록 일해도 언제 한번 자식들에게 변변한 생일상 한번 차려주지 못하고 생일날 아침이면 고작해서 골싹한 백미밥 한그릇을 내놓는것이 너무도 가슴아파 눈굽을 적시군 하던 어머니가 오늘의 내 모습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기뻐했으랴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날줄 몰랐던것이다.

나는 이렇게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 인생의 모든 꿈을 이루었다.

혈혈단신으로 조국의 품에 안겼지만 인간으로서, 교육자로서, 과학자로서 누구나 선뜻 누릴수 없는 영광과 행복의 단상에 오른 나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웨치고싶다.

사회주의제도에서만 존엄높고 행복한 참된 삶을 누릴수 있다고, 목숨보다 귀중한 사회주의조국을 위해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지혜와 열정을 깡그리 바쳐가겠다고.

평양의학대학 인민과학자 후보원사 교수 박사 박승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