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5. 《로동신문》 6면
지난해 12월의 마지막날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전원회의소식이 실린 당보를 펼쳐든 평양미술대학 산업미술학부 교원 리의성은 오래도록 거기서 눈길을 뗄수 없었다.
조선인민군창건 75돐,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 경축행사들이 우리 당과 국가, 인민의 존엄과 위신, 일심단결된 참모습을 만천하에 힘있게 과시하였다는 내용의 글줄을 이제는 수십번이나 더 읽어본 그였다.
자기가 창작한 경축행사마크도안들이 그 뜻깊은 날들의 환희를 더해주었다는 생각에 의성의 가슴은 벅차올랐다.하다면 그 도안들이 그 한사람의 열정과 재능의 산물이였던가.
《뗑-뗑-》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유정하게 울려왔다.그 소리는 추억의 문을 열며 지나온 날들의 하많은 이야기들을 불러왔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내다보며 우리의 산업미술을 하루빨리 세계산업미술의 전렬에 내세우기 위하여 뛰고 또 뛰는것이 우리 당의 품속에서 자라난 참된 산업미술가의 모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시계는 22시를 가리키고있었다.
온종일 강좌의 교원들과 함께 다음해에 진행될 조선인민군창건 75돐 경축행사의 마크도안창작을 놓고 토론을 거듭하던 의성은 방금전에야 퇴근길에 올랐다.
그의 귀전에서는 교원들의 목소리가 계속 맴돌고있었다.
《의성선생, 왜 신심이 없어하오.난 그 착상이 엉뚱하다고 보는데.》
《심의에 제출해보기요.도안가라면 자기가 내놓은 안에 대한 주견이 있어야지.》
교원생활의 첫발을 내짚은 자기를 고무해주는 그 마음은 고마왔지만 미완성작품을 심의에 제출할수는 없었다.
의성이 내놓은 도안은 군모의 별과 닻, 날개로 륙해공군을 형상하고 2.8이라는 수자를 따로 써놓은것이였는데 보기에도 구성이 복잡하였다.
선과 점 하나, 그 각도와 크기, 색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지는 마크도안에서는 간결성과 집중성, 상징성이 보장되여야 하는데 아무리 음미해보아도 마크도안이라기보다 구구하게 설명을 늘어놓은 설계도면이라고 해야 제격이였다.
맥없이 걸음을 내짚는 그의 눈앞에 흘러온 시절이 어제일이런듯 밟혀왔다.
의성이 어려서부터 남몰래 그려본 앞날의 자기 모습은 화가였다.
동창군의 산골마을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장직관원인
의성이가 유치원때 꽃과 나무, 종달새 같은것을 나름대로 그려 처마밑에 척 걸어놓은것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 집에서
사실 의성은
한가정의 울바자를 벗어나지 못했던 의성의 재간은 중학교에 올라가서부터 빛이 나게 되였다.학생들의 소질과 재능을 모두 찾아 꽃피워주는 고마운 제도의 해빛은 산골학교에도 비쳐들어 그는 소원대로 미술소조에 다니게 되였다.
매일 화판을 메고다니며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동안 그는 안그려본 그림이 없었다.
이렇게 해가 바뀌여 중학교졸업반때에는 군적으로도 그를 따를만한 학생이 없었다.그러던 어느날 의성이 도에서 진행하는 어느한 경연에 고향마을의 풍경을 그린 연필화를 내놓았는데 뜻밖에 순위권에도 들지 못할줄이야.
그날 볼이 부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화판을 내팽개치며
《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어요.이거야 어디 창피해서.》
그러는 그를
《네 이름이나 내라고 선생님들이 그렇게 품들여 배워준게 아니다.네가 꿈을 버리는것은 바로 그 고마운 사람들을 욕되게 하는것이란다.언제나 꿈을 귀중히 여기고 리상을 높이 세우거라.》
군사복무시절 몸소 부대를 찾아주신
등뒤에서 누군가 찾는 소리에 의성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강좌장 김춘성이였다.
《상이 잘 떠오르지 않는게로구만.이 도안이 몇번째던가?》
《교원이 된 후로는 첫 마크도안입니다.대학생시절에는 선생님들의 방조속에 도안을 완성했는데 정작 저 혼자서 감당해야 하니 정말 힘이 듭니다.》
자기의 첫 강의를 듣고는 마크도안의 세계에 빠져들어 다짜고짜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들이대던 어제날의 제대군인대학생의 모습을 그려보는듯 김춘성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어리였다.
평양미술대학 교원, 학생들이 창작한 산업미술도안을 보아주시고 분에 넘치는 평가도 해주시고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은정도 거듭 베풀어주시는
대학 3학년때 벌써 새해축하장도안을 훌륭히 창작하여 전도유망한 도안창작가후비로 소문을 냈고 대학생과학탐구상수상자,
의성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체육경기에서라면 1등이 있고 그뒤로 2, 3등이 있소.하지만 우리 마크도안가들에게는 제일 최고인 한개의 도안만 있을뿐이요.그 높은 정점에 도달하는것이 우리 도안가들의 목표이고 리상이지.내 생각엔 의성선생의 도안이 현실적인것이 되자면 책상머리에선 안될것같구만.》
의성은 그제서야 자기 잘못을 깨달았다.산업미술분야에서 새롭고 특색있는것을 창작한다고 하여 주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허황한 상징적도안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고 하신
한겨울의 추위는 맵짰지만 그는 지체없이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으로 향하였다.기념관앞에 거의 다달은 의성은 숙연한 눈빛으로 승리상을 응시하였다.
(승리를 의미하는 군모의 저 별과 항일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인민군의 창건을 알리는 2.8이라는 수자를 잘 배합한다면…)
그는 뭔가 착상이 떠오른듯 주머니를 뒤적이였다.늘 가지고다니던 연필을 꺼내서 초고지에 힘있게 그어나갔다.
이렇게 그려보기를 무려 수십번…
한쪽모서리가 집게에 끼워진 여러장의 초고지가 한겨울의 바람결에 펄럭이며 그의 사색을 부채질하는듯했다.
마침내 그는 군모의 오각별과 2.8이라는 수자를 배합하여 힘있는 사선느낌으로 형상하였고 륙해공군을 의미하는 세개의 빗선을 부각시켜놓았다.
그는 이렇게 완성된 도안을 심의에 제출하였다.그로부터 며칠후 해당 일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의성동무, 축하합니다.
의성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 땅의 모든것이 자기를 축복해주고있는듯한 무한한 행복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다.어제날 산골소년의 꿈이 명도안가의 리상으로 커지기까지 얼마나 따사로운 사랑의 해빛이 그의 앞길에 비쳐들었던가.
의성은 어제날 산골학교의 키낮은 책상에서, 대학의 교정에서 미술의 세계를 알게 해준 고마운 스승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철없던 그 시절부터 알게모르게 기울여준 당의 사랑이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자양분이 되여 자기의 리상이 실현되고있음을 가슴뜨겁게 느끼였다.
많은 사람들이 30대초엽에 남들은 한생을 바쳐도 올라설수 없는 높이에 이른 그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낼 때마다 그는 말하였다.
《제가 받아안은 사랑에 보답하자면 아직 첫걸음에 불과합니다.고마운 당과 제도의 품속에서 저의 리상은 나날이 커가고있습니다.》
* *
지난해에 그는 첫 마크도안에 이어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 마크도안,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경축 열병식 영웅종대사진틀도안, 경공업제품전시회 《경공업발전-2023》마크도안, 《가을철피복전시회-2023》마크도안, 《진달래》손전화기마크도안을 비롯한 70여점의 도안을 훌륭히 창작하여 산업미술의 발전을 힘있게 떠밀고 우리 국가의 위상을 과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지금 이 시각도 도안창작의 붓을 쉬임없이 달리고있다.
고마운 당과 조국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늘 사색하고 창조하는 사람만이 자기의 리상을 높이 세울수 있으며 반드시 현실로 꽃피울수 있다는것을 한 명도안창작가의 생활은 다시금 보여주고있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강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