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5. 《로동신문》 5면
《조선로동당의 진모습은 당이 꾸려놓은 조국의 모습에 있고 언제나 행복에 겨워있는 인민의 모습에 있습니다.》
수도 평양의 동쪽관문에 우리 당의 인민에 대한
그동안 송화거리주인들의 새 생활은 어떻게 흘러온것인가.
그 나날 그들이 받아안은 사랑은 그 얼마이며 꽃펴난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많을것인가.
이런 생각을 안고 우리는 얼마전 송화거리에 대한 취재길에 올랐다.
대동강다리를 지나 송화거리방향으로 가는 선교-송화행 무궤도전차에 오르니 얼굴마다 밝은 웃음을 담은 사람들로 하여 전차안에 흐르는 공기도 따뜻하게만 여겨졌다.
무궤도전차운전사 정광명동무는 이렇게 말하였다.
《선교-송화행 무궤도전차는 송화거리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이 리용하고있습니다.행복의 보금자리에 살림을 펴게 될 근로자들을 위해 당에서는 새집들이시작과 함께 이 무궤도전차운행을 보장하도록 하였습니다.지난해부터 또 다른 새형의 무궤도전차들도 운행을 시작했는데 송화거리주민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승객들도 성수가 나서 한마디씩 하였다.
《희한한 새집에서 살면서 새 무궤도전차를 타고다니니 정말 좋습니다.》
《색갈곱고 멋있는 무궤도전차들이 줄지어 달리는데 어떤 때에는 전차가 손님들을 기다리군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느라니 송화거리의 평범한 근로자들을 위한 우리 당의 사랑이 여기 무궤도전차운행로선에도 깃들어있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졌다.
어느덧 전차는 웅장화려한 송화거리에 들어섰다.
하늘을 찌를듯 치솟아오른 초고층, 고층살림집들과 특색있게 건설된 봉사망들이며 원형고가다리…
황홀경을 펼친 거리의 수많은 건물들이 저마다 반기며 어서 오라 부르는듯하였다.
우리의 걸음은 사람들 누구나 경탄하는 이 거리의 상징건물인 80층초고층살림집으로 향하였다.
낯익은 모습들이였다.자기들에게 안겨진 하늘같은 사랑에 접하고 너무도 감격하여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새집의 주인들, 어머니당에서 로동자들의 생활을 속속들이 다 헤아려 덩실한 새 살림집을 안겨주었다고 가슴들먹이던 그들, 하나같이 밝은 모습들속에서 우리는 최세연전쟁로병을 알아볼수 있었다.
그새 더 젊어진것같다고 하는 우리에게 로병은 당의 은덕으로 이렇듯 훌륭한 아빠트에서 부러운것없이 살고있는데 어찌 젊어지지 않겠는가고 하였다.이어 로병은 송화거리의 새집에 입사한지 2년이 되여오지만 아직도 꼭 꿈을 꾸는것같다고, 그 나날은 우리 인민에 대한 당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따스한가를 깊이 절감한 나날이였다고 하면서 희한한 새집에서 부러운것이 없는데 구역의 일군들이 자주 찾아와 생활을 돌봐주니 몸둘바를 모르겠다고 이야기하였다.
오늘의 이 행복을 안겨주신
우리는 이곳 주민들의 편리를 적극 도모해주는 승강기운전공의 이야기도 들었다.
승강기운전공은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열의를 안고 퇴근시간을 미루어가는 주민들이 날로 늘어만 가는데 그들속에는 부부혁신자들도 있다고 하는것이였다.
그의 이야기를 기쁘게 들으며 우리는 33층 4호에 사는 부부혁신자가정을 찾았다.
세대주 최영일동무와 그의 안해인 리화순동무는 김정숙평양방직공장에서 손꼽히는 혁신자들이였다.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리화순동무는 살림방들과 부엌, 세면장의 문들을 연방 열어제끼며 우리에게 집자랑을 늘어놓았다.
《방은 환하고 넓지, 부엌에서는 수도물이 콸콸 쏟아지지, 세면장에는 물가열기도 있습니다.이런 훌륭한 집이 우리와 같은 평범한 가정에도 차례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정말 우리는 이 집에서 호화생활을 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송화거리의 새집으로 이사오기 전에는 늘 직장일로 바쁘다나니 상점구경가기도 힘들었는데 여기에 와서는 불편한것이 하나도 없다고, 80층아빠트의 5층까지가 봉사망이여서 생활에 편리하다고 하였다.
평범한 근로자들에게 세상이 부러워할 행복을 마련해주기 위해 그리도 세심히 마음쓰고 심혈을 기울인 당의 사랑이 이들의 생활속에 속속들이 깃들어있음을 우리는 더욱 절감하였다.
새집들이경사가 있은 때로부터 송화거리의 80층아빠트에도 새 식솔들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새집에서 온 동리가 부러웁게 인물곱고 마음씨고운 며느리를 맞아들인 가정도 있었고 귀여운 아들, 딸자식들을 본 집도 있었다.
우리는 15층 9호의 박진복어린이의 집을 찾았다.알고보니 박진복어린이는 이 가정의 다섯째 딸이였다.
어머니인 주영희녀성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임신부였던 주영희녀성이 심한 통증을 느낀것은 국가방역사업이 최대비상방역체계로 이행되였던 두해전 5월의 어느날이였다.예정일을 앞당긴 진통이여서 그도 가족들도 당황함을 금할수 없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보건제도의 혜택속에, 인간생명의 수호자로서의 본분을 먼저 생각하고 주민세대들에게 정성을 쏟아붓는 의료일군들의 성실한 방조속에 그는 무사히 순산할수 있었다.
그 엄혹한 국난의 시기에도 주영희녀성과 그의 가족들은 매일, 매 시각 와닿는 당의 한량없는 사랑을 눈물속에 체험하였다.
120㎡짜리 덩실한 새집에서 키도 몸무게도 부쩍부쩍 자라는 자식들의 모습은 그들내외의 둘도 없는 기쁨이고 행복이였다.
하기에 그들은 근로하는 인민을 제일로 내세우는 사회주의제도에서 태여난 복을 대대손손 전해가라고 막내딸의 이름을 진복이라고 지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주영희녀성은 공민으로서 너무나 응당한 일을 하였는데 당에서는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에까지 불러주었으니 그 감격을 어찌 한두마디로 다 전할수 있겠는가고, 자식모두를 나라를 지키는 병사로 떳떳이 내세우겠다고 절절히 말하였다.
우리는 자연의 별세계보다 더 아름다운 불야경을 펼친 송화거리에 나섰다.
우리 집에도 어서 들려보라는듯 거리의 아빠트창문들이 저마다 빛을 뿌리며 반짝이였다.
그 어느 집, 그 어디를 찾아가보아도 평범한 근로자들을 위한 어머니당의 사랑이 공기처럼 흐르는 송화거리,
우리 인민에게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문명한 생활을 안겨주는것을 숙원사업으로 내세우고 모든것을 다하는 고마운 당이 있기에 이 아름다운 거리에서는 복받은 인민의 웃음소리가 영원히 울려퍼질것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오래도록 발길을 뗄수 없었다.
본사기자 엄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