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24. 《로동신문》 4면
《군당책임비서는 군사업을 당적으로, 정치적으로 책임지고 조직집행하는 당의 파견원입니다.》
과수의 고향 북청군이 몰라보게 전변되였다.
수천정보의 과수원건설이 끝나 온 군이 거대한 청춘과원으로 변모되고 농장마다 축산기지들이 건설되여 과수와 축산의 고리형순환생산체계가 구축되였으며 5 000t능력의 과일보관고와 과일가공공장이 일떠서고 지구별과일보관고건설이 힘있게 진척됨으로써 대규모과일생산기지로서의 면모를 원만히 갖추게 되였다.
북청군혁명사적관, 군과 리의 문화회관들, 은덕원과 미래원 등 교양거점들과 문화 및 편의봉사기지들, 수백동의 공공건물과 1천여세대의 살림집들, 모든 병원과 진료소들, 10여개의 학교, 30여개의 유치원, 탁아소, 50여개의 다리가 번듯하게 건설 및 개건되고 룡전과수농장을 비롯한 농장들의 면모가 일신되였다.
이 거대한 전변에는 기수가 있다.
당중앙의 지역적보좌관, 파견원!
이것은 당중앙이 시, 군당책임비서들에게 안겨준 최상최대의 믿음이다.
그가 지닌 삶의 좌우명, 능숙한 방법론, 헌신의 자욱은 우리 당의 시, 군강화로선관철에서 당중앙의 지역적보좌관들이 어떤 사업기풍과 일본새를 발휘해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으로 된다.
높은 리상과 완강한 실천력, 이것이 관건이다
시, 군의 발전수준은 책임비서들의 리상과 실천력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북청군의 전변을 놓고 우리가 확신하게 되는것이 바로 이 점이다.
당의 구상에 자기의 리상을 따라세우고 그것을 완강하게 실천하는것은 한영식동무의 사업에서 찾아보게 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군당책임비서로 갓 임명된 한영식동무는
과수의 고향인 북청군을 현대적인 대규모과일생산기지로, 당의 구상과 념원이 꽃피는 인민의 락원으로 전변시키리라!
이것은 그의 리상으로, 삶의 좌우명으로 되였다.
높은 리상도 완강한 실천력이 안받침되여야만 현실로 이어질수 있는것이다.
한영식동무의 실천력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것은 과학적인 작전이다.
군을 대규모과일생산기지로 전변시킨다는것은 결국 알곡위주의 농업생산구조를 완전히 바꾼다는것을 의미했다.경험도 기술도 자금도 부족한 형편에서 모든것을 자체의 힘으로 해낸다는것은 참으로 아름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는 구체적이면서도 치밀한 작전이 없이는 이 방대한 사업을 성과적으로 이끌어나갈수 없다고 보았다.
과학적인 안목으로 군안의 인적, 물적잠재력을 정확히 투시해보고 여러가지 조건과 가능성을 충분히 따져본데 기초하여 해당 분야의 일군들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 과정에 과수원을 조성하고 과일보관고와 과일가공공장, 수많은 하부구조물들을 건설하기 위한 년차별계획이 빈틈없이 세워졌고 선후차와 중심고리들이 명백히 정해지게 되였다.
하다면 이러한 치밀한 작전을 낳게 한 밑바탕에는 무엇이 놓여있는가.
군당책임비서의 높은 실력이다.
군일군은 우리에게 룡전과수농장 당우분장의 포전에서 과수밭조성을 위한 기술강습이 처음으로 진행되던 때의 인상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군안의 농장 당, 행정, 기술일군들과 련관부문 일군들을 비롯한 강습참가자들은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군당책임비서가 강사로 출연하였던것이다.
책임비서의 강의를 통하여 참가자들은 비로소 대규모과수업에 대한 정확한 리해를 가지게 되였으며 과일나무재배와 과수농장관리운영에서 나서는 여러가지 기술적문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되였다.
과수분야에 완전히 정통하고있는 책임비서의 강의에 모두가 감탄했지만 그렇듯 높은 실력을 지니기까지 그가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 다는 알지 못했다.
그는 이미 과수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있었지만 새로운 선진기술을 파악하는 사업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았으며 건설, 축산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학습을 심도있게 진행하였다.
과일나무모생산기지조성과 식물성농약생산기지건설, 과수와 축산의 고리형순환생산체계확립, 해안방풍림조성에 이르기까지 한영식동무의 기발한 착상과 진지한 탐구의 노력이 깃들지 않은 분야란 없다.
몇해전 과일보관고에서 리용할 과일상자문제해결이 초미의 과제로 나섰을 때였다.
상자구입에 드는 자금이 간단치 않은것으로 하여 일군들은 방도를 찾지 못해 안타까와하였다.
한영식동무는 그 해결책도 다름아닌 책임비서자신이 내놓아야 한다고 여기였다.
피타는 사색과 연구끝에 그는 새로운 착상을 하였으며 그 기술적담보와 함께 도안과 설계도 내놓았다.이렇게 되여 초기에 타산했던 액수의 10분의 1도 안되는 자금으로 과일상자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게 되였다.
오늘날 과학기술실력은 당일군의 가치와 그가 지닌 충실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실력제고를 단순히 사업권위와 관련된 문제로가 아니라 지역발전을 견인하고 당중앙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운명적인 문제로 대하며 사활을 걸고 달라붙은데 과학적인 작전, 완강한 실천의 비결이 있는것이다.
군을 대규모과일생산기지로 전변시키기 위한 사업을 10여년간 줄기차게 견인하면서 한영식동무가 내세운 철칙이 있다.
하나하나의 창조물을 인민앞에, 후대들앞에 떳떳할수 있게 완벽하게!
이것이 그의 실천력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측면이라고 볼수 있다.
방대한 면적의 과수원을 건설하는데서 제일 힘든것이 무엇이였는가.
우리의 물음에 군일군들은 거름원천을 확보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보당 100t의 거름을!
엄청난 수자앞에 사람들이 걱정만 하고있을 때 군당위원회주변의 공지에는 책임비서를 비롯한 군당위원회일군들의 이름이 적힌 표말이 박히였고 거름더미가 쌓이기 시작했다.군당위원회뜰안에서 시작된 거름원천확보를 위한 사업은 온 군에 파급되였다.
이렇게 마련된 거름을 내는데서 한영식동무는 사사오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언제인가 천서지구에 나가있던 군농업경영위원회의 한 일군이 토질이 좋다고 하면서 필요한 수량을 보장하지 않고 거름묻어주기를 끝낸적이 있었다.
필지별반출량을 현지에서 직접 확인하던 책임비서는 실적을 내는데만 집착하는 그 일군의 일본새를 되게 질책하였다.
오늘 땅을 속이고 자기자신을 속이면 그 후과를 인민들이, 후대들이 치르게 된다.
책임비서의 말을 들으며 현장일군들모두가 각성하게 되였다.
몇해전 과일보관고와 과일가공공장건설이 한창일 때였다.
공사실적이 처지는 원인을 찾기 위하여 현장에 나간 책임비서는 건설자들과 함께 한참이나 땀을 흘리면서 실태를 파악하는 과정에 현장일군들의 일본새에 문제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로력조직과 기술지도를 구체적으로, 째이게 하지 못하여 자주 반복시공을 하고 공사기일을 보장한다고 하면서 돌격식으로 사업을 조직하는것이였다.
이러한 그릇된 일본새가 형식주의를 낳고 결국에는 속살이 지지 못한 결과물을 내놓게 될수 있었다.
한영식동무는 현장일군들을 각성시킨 후 그들의 조직사업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바로잡아주었다.건설의 매 공정의 선후차를 똑바로 정한데 기초하여 로력조직을 합리적으로 하도록 하였으며 일별, 주별, 월별로 작업계획을 치밀하게 세우도록 하였다.
시공기일을 보장하지 못하고도 가책을 받지 않고 건설물의 질보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일군들은 자기들의 관점과 태도를 새롭게 정립하고 공사지도에 뼈심을 들이게 되였다.
당앞에 내놓는 창조물은 최상의 수준, 완벽한것이여야 한다는 책임비서의 이러한 투철한 관점에 의하여 과수원조성과 과일보관고, 과일가공공장건설에서 질이 철저히 보장되게 되였다.
일군의 리상은 발전지향적이여야 하며 투쟁목표는 부단히 높아져야 한다.
일군이라면 무엇을 하나 해놓았다고 만세를 부를것이 아니라 당의 의도와 발전하는 시대의 요구에 자기의 리상을 부단히 따라세워야 한다는것이 한영식동무의 지론이다.
북청군혁명사적관을 새로 건설하던 때의 사실을 놓고보자.
군에 깃들어있는 당의 불멸의 령도업적을 일군들과 근로자들에게 깊이 체득시켜 과수의 고향을 더욱 꽃피우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게 하기 위하여 혁명사적관을 새로 일떠세울것을 발기한 그는 건설의 질을 최상의 수준에서 보장하도록 요구성을 높였다.
사실 혁명사적관건설은 군이 제일 어려운 시기에 진행되였다.
4년전 태풍과 큰물로 신창지구를 비롯한 군안의 여러 지역에서 심한 피해를 입고 더우기 세계적인 보건위기까지 겹쳐 적지 않은 일군들이 신심이 없어하였다.
태풍피해복구도 힘겨운데 혁명사적관건설은 좀 미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울려나왔는가 하면 시공을 맡은 일부 돌격대원들속에서는 질보장에 품을 들이지 못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군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혁명사적관건설만은 잠시도 미룰수 없다.그저 건설하는것이 아니라 최상의 질을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군당책임비서의 드팀없는 결심이였다.
군혁명사적관건설과정은 일군들과 돌격대원들의 관점과 일본새에서 근본적인 개변을 가져온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제1차 시, 군당책임비서강습회에 참가하여
당의 령도업적이 뜨겁게 깃들어있는 룡전과수농장을 보다 훌륭히 꾸리기 위한 사업을 스스로 당적분공으로 맡아안고 혼심을 다 바치고있는것이 집중적인 표현이다.
새로운 농촌문명을 창조할데 대한 당의 의도를 높이 받들고 리문화회관들과 병원, 진료소들을 훌륭히 꾸린 사실, 농촌학교에 가면 꼭꼭 교수참관을 하면서 농촌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세워나가는 사실에서도 끊임없이 높은 목표를 세우고 발전을 지향해나가는 그의 사업태도와 일본새를 느낄수 있다.
시, 군당책임비서들이 자기 지역을 인민들이 실질적인 복리와 문명을 누리는 행복의 터전으로 전변시키자면 높은 리상과 강렬한 의욕을 가지고 완강한 실천력을 발휘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한영식동무의 사업을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결론이다.
당사업의 가장 큰 실적-인간육성
시, 군당책임비서의 사업실적은 어떻게 평가되는가.
경제사업과 교육 및 보건사업, 국토관리, 인민생활 등 지역의 여러 부문, 분야의 실태를 놓고 평가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적평가의 첫번째 항목은 인간육성으로 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지역발전의 주체가 바로 일군들과 군중이기때문이다.
실지로 북청군은 농촌경리와 지방공업, 국토환경보호, 교육과 보건, 군중문화예술활동 등 어느 부문, 분야 하나 빠진데가 없이 당정책관철에서 앞장선 군으로 평가되고있다.
그 요인을 한마디로 쥐여짜면 주체가 믿음직하게 준비된데 있다.
일군들과 당원들, 군중과의 사업을 능숙하게 전개하여 지역발전을 위한 투쟁을 대중자신의 사업으로 확고히 전환시킨것은 한영식동무의 사업기풍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특징적인 점이라고 할수 있다.
요구성만 높일것이 아니라 직능에 맞게 과업을 주며 배워주고 방도를 가르쳐주면서 실천투쟁을 통하여 일군들을 키우는 스승이 되자.이것이 군당책임비서로 사업하는 전 기간 그가 견지한 원칙이다.
군당위원회일군들을 실력가들로 준비시킨 사실을 놓고보자.
한영식동무가 제일 힘을 넣은것은 조직부 일군들과의 사업이였다.당위원회의 참모부서라는데도 있었지만 배워주지 않고 요구성만 높이다가는 그들속에서 행정실무화경향이 나타날수 있기때문이였다.그는 아무리 바빠도 책임지도원, 지도원들의 하부지도사업총화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사업정형을 구체적으로 료해하는 한편 여러가지 정황에 따르는 당정책관철대책안을 작성하게 하는 등 당사업실무수준을 높여주기 위한 노력을 각방으로 기울이였다.당사업원리만 가르쳐준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사업의 본도에 맞게 사업하도록 실천속에서 배워주고 이끌어주었다.
몇해전 봄 그는 가물과의 투쟁이 한창인 농장들에 파견된 조직부 책임지도원, 지도원들의 활동정형을 알아보았다.그런데 당의 방침을 되받아외우고는 로력과 농기계가동정형이나 장악하고 물바께쯔를 들고 뛰여다니는 현상이 보편적이였다.한마디로 당조직일군들이 행정적방법으로 일하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상황이 제일 어려운 초리과수농장에서 협의회를 열고 여기에 조직부 책임지도원, 지도원들도 참가시켰다.
농장일군들은 김매기와 과일나무비배관리가 겹쳐 로력이 긴장하다고 우는소리만 하였다.책임지도원, 지도원들이 보고하는 다른 농장들의 실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방도가 없는가.
조직을 움직이고 초급일군들을 발동하는데 로력예비가 있다면서 그는 당 및 근로단체조직별로 돌격대를 조직, 운영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당세포비서돌격대, 청년동맹초급일군돌격대, 농근맹초급일군돌격대를 조직하여 늦저녁과 새벽에 한시간씩 돌격대활동으로 가물피해를 극복하자는것이였다.
이것은 열을 발동하여 백, 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당면한 영농공정수행과 가물과의 투쟁을 다같이 추진시킬수 있는 최선의 방도였다.이후의 투쟁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조직부 일군들만이 아니다.
직관선전을 강화할데 대한 당의 방침관철을 위해 선전선동부 일군들에게 구조물로 된 구호와 표어배치도는 물론 형성안까지 작성, 제출하도록 하고 함께 현지를 돌아보면서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깨우쳐준것도 그들의 정치실무수준, 사업능력을 높이게 한 귀중한 수업으로 되였다.
그 과정에 군당일군들이 당사업원리와 방법을 체득하고 당정책관철을 보다 확신성있게 견인할수 있게 된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이 사실은 많은것을 생각하게 해준다.군당위원회의 모든 일군들이 조직과 군중을 발동하는 진정한 당사업을 하도록 원리적으로 일깨워주고 사업묘리도 배워주는것이야말로 그들의 성장과 발전 나아가서 군의 오늘과 래일을 당앞에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겠는가.
과수농장 당, 행정책임일군들이 지역발전의 핵심력량으로 준비된데도 한영식동무의 진지한 노력이 깃들어있다.
군이 과수전문군으로, 군안의 대다수 농장들이 과수농장으로 전환된 실정에서 일군들의 과수지식을 높이는것은 군의 발전과 운명을 좌우하는 절실한 문제로 나섰다.
그는 과수농장 당, 행정책임일군들속에서 과수학에 대한 학습열풍을 일으킬것을 결심하였다.학습문제선정을 비롯한 문답식학습경연준비에 깊은 관심을 돌리고 경연을 실속있게 진행하도록 하였으며 그 결과를 일군들의 모임장소에 게시하고 총화를 맵짜게 하였다.과수원조성과 비배관리를 바로하지 못한 포전에 일군들을 데리고나가 과학기술을 모르면 심각한 후과를 초래한다는것을 실물로 보여주면서 각성시키는 사업도 진행하였다.
과수업과 관련한 다매체편집물시청, 북청기술대학 교원들의 순회강의와 기술전습, 과일군에 대한 참관을 조직하는 등 과학기술학습을 군당위원회적인 사업으로 완강하게 밀고나갔다.
결과는 좋았다.자기 집뜨락에 사과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피타게 배워 전문가수준에 올라선 종봉과수농장 경리를 비롯하여 과수농장 당, 행정책임일군들의 실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져 과수업발전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할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군중과의 사업에 품을 들여 군안의 모든 인민들을 군발전을 떠메고나가는 주인들로, 당을 받드는 초석으로 키우자.이것은 한영식동무가 시종일관 견지해온 또 하나의 사업원칙이다.
인재들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돌려 지역발전의 기둥으로 내세운 과정을 놓고보자.
7년전 전국과수부문열성자회의에 참가하여 과일생산단위들에서 지방의 원료원천을 탐구동원하여 부족되는 농약을 자체로 만들어쓰기 위한 투쟁을 벌릴데 대한
그는 기술자와 함께 이름난 과수농장들을 찾아다니면서 앞선 경험과 기술을 배울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중앙과 도의 연구단위, 과학교육단위들과도 련계를 맺어주는 등 품을 아끼지 않았다.
북청지방에 흔한 원료로 효능높은 농약을 수요에 맞게 생산공급할수 있는 기초는 이렇게 마련되였다.군의 과수업발전을 떠메고나갈 또 한명의 인재가 성장한것이 더 큰 성과이다.
인재들과의 사업에 품을 들인다는것은 결국 그들의 안목을 틔워주고 창조력이 최대로 발양되도록 계기를 주동적으로 마련해준다는것이 아니겠는가.
한영식동무가 각별히 주의를 돌린것이 바로 이 측면이였다.
인민군대의 건설부대에서 단련된 제대군인들로 미장소대를 조직한 그는 소대원들에게 군건설전망도 알려주고 수도에 자주 올려보내여 눈을 틔워주면서 군에서 제기되는 그 어떤 공사도 막힘없이 해제끼는 건설핵심으로 키워냈다.
부모는 못난 자식이라고 하여 차별하지 않으며 더 왼심을 쓴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들일수록 더 세심히 관심하며 정과 믿음으로 이끌어주는것이 그의 남다른 장점이다.
군대흥관리부 로동자 곽동무를 교양하여 조선로동당원으로 키운 실례가 있다.
젊은 시절에 범한 과오로 하여 고민하며 일을 잘하지 않는다는 자료를 보고받은 책임비서는 그에 대한 교양을 맡아나섰다.
그 나날 인생의 새 출발을 결심한 곽동무가 삼지연시건설장에 탄원했을 때에는 생활필수품도 마련해주었으며 출장길에 들려 가족들의 안부도 전해주면서 정을 기울이고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삼지연시건설에서 로력적위훈을 세운 그가 입당하게 되였을 때에는 누구보다 기뻐하며 보증인이 되여주었다.
초급당일군들마저 포기하였던 룡전과수농장의 종업원을 자진하여 맡아 수년간이나 직심스럽게 교양함으로써 혁신자로 키운 사람도, 법적제재를 받고 나와서도 개심하지 못하던 락오자를 기능과 소질에 맞는 초소에 세워주고 병치료에 필요한 귀한 약재도 해결해주면서 뜨거운 정으로 재생의 길에 들여세운 사람도 바로 책임비서였다.
친부모의 심정으로 가슴속에 맺혀있는 응어리를 풀어주는 군당책임비서의 사랑과 믿음은 참된 인생의 궤도에서 탈선했던 사람들을 성실한 사회주의근로자로 키우는 밑거름이 되였다.
이렇게 품들여 배워주고 운명을 지켜주고 이끌어준 일군들, 근로자들이 군을 떠메고나가는 믿음직한 주인으로 성장하였다.
경제사업결과나 건설실적과는 달리 인간육성실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그러나 군당책임비서들이 당중앙의 지역적보좌관, 파견원으로서 자기 사업을 돌이켜볼 때 가장 긍지높이 자부하게 되는것은 바로 수백, 수천만자루의 품을 들여 육성해낸 지역발전의 기본동력-충실한 일군들과 근로자들의 대부대가 아니겠는가.
어머니가 자식 하나를 키우는데 오만자루의 품을 들인다면 군당책임비서는 자기 군의 일군, 근로자들 한명한명을 키우는데 백만자루, 천만자루의 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바로 그럴 때에만 군이 나라의 전반적발전을 떠받드는 강력한 보루로서의 역할을 다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이 한영식동무의 사업을 놓고 내리게 되는 또 하나의 결론이다.
인민앞에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만나본 북청군사람들은 누구나 눈물이 글썽하여 말했다.
우리 책임비서동지처럼 인정이 많고 청렴결백한 일군은 없을것이다.남들같으면 열백번은 쓰러졌을 가정적인 불행과 아픔을 언제한번 내색함이 없이 크고작은 일감을 다 맡아안고 애쓰는 책임비서동지를 볼 때마다 눈물이 앞서군 한다.…
인민의 눈물에는 거짓이 없다.
한영식동무가 이런 진심어린 평가를 받게 된 근본바탕에는 온넋으로, 신조로 만든 우리 당의 인민관이 놓여있다.
무슨 사업을 하나 조직해도 인민들의 편의를 최우선, 절대시하는 원칙을 견지하고 실천투쟁속에서 일군들의 관점을 개변시킨것이 선차적으로 주목되는 문제이다.
은덕원을 개건하던 때의 이야기가 있다.
사실 건물개건을 하자면 운영을 중지하는것이 상례여서 은덕원개건안을 작성하는 일군들 역시 그렇게 타산했었다.
그 개건안은 대번에 부결되였다.
그동안 인민들이 겪을 불편을 생각해보았는가.기간이 오래 걸려도 편의봉사와 개건을 동시에 내밀자.
이것은 책임비서의 의견이라기보다 되돌릴수 없는 확고한 립장이였다.
편의봉사를 중단없이 진행하면서 한 대상씩 돌려가며 하다나니 초기에 반년으로 계획했던 은덕원개건이 3년이나 걸렸다.개건기일이 몇배로 늘어나 일군들은 고생스러웠어도 인민들은 덕을 보았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모든 일군들에게 인민의 불편이 꼭같이 느껴지는가, 인민을 위한 일감이 꼭같이 보이는가 하는것이다.
아니다.인민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당의 인민관을 삶과 투쟁의 좌우명으로 삼았기에 한영식동무는 덧없이 흐르던 수질좋은 샘물을 목욕봉사에 리용할 착상을 하고 은덕원지하에 커다란 예비물탕크를 건설하는 공사도 단행할수 있었다.
장마철이면 불어나는 강물에 작은 다리가 잠겨 50여리나 에돌아다니는 수백명 주민들의 불편을 헤아려 지난해 새로 번듯하게 건설한 석송청년다리도, 리소재지에서 퍼그나 떨어진 곳에 있는 유치원에 다니느라 힘들어할 아이들을 위해 리중심에 멋들어지게 일떠세운 봉곡과수농장10일유치원도 우리 당의 인민관을 체질화한 책임비서의 결단이 낳은 창조물들이다.
가장 소중한 성과는 인민을 대하는 일군들의 관점이 개변된것이다.군내 주민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리익을 도모하기 위한 일감을 찾아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과정에 일군들에게도 우리 당의 인민관이 넋으로 새겨졌다.
자기의 고뇌와 피땀의 대가로 인민들의 웃음을 꽃피울수 있다면 그것을 인생의 가장 큰 행복과 보람으로 여기는 숭고한 헌신과 희생, 이것이 한영식동무의 삶을 특징짓는 중요한 징표이며 총화라고 볼수 있다.
우리 당력사에서 처음으로 열린 제1차 시, 군당책임비서강습회 페강을 선언하시면서
인민앞에 나는 누구인가.
한영식동무는 삶의 순간순간 이런 량심의 물음앞에 자신을 세웠으며 스스로 가혹하다고 할 정도의 높은 요구성을 제기하고 멸사복무의 주로를 쉼없이 달려왔다.
두해전 신북청로동자구유치원을 개건할 대담한 목표를 세우고 형성안작성으로부터 자재보장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대책을 세워준 그는 수십t의 세멘트를 실은 차에 군당일군을 태워보내며 신신당부했다.
지난해 불치의 병으로 병석에 누워서도 그는 완공하지 못한 유치원을 두고 마음을 놓지 못했다.대수술을 받은 몸이지만 매일 전화로 공사정형을 보고받고 대책을 세웠으며 잠방침대문제가 제기되였을 때에는 자기가 직접 군건설려단 목공소대장에게 어린이들의 동심에 맞게 잘 제작하도록 과업을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문제를 세워본다.
당일군의 육체적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군인민들의 생활을 당앞에 책임진 당일군이라는 자각, 자기가 뼈를 깎는 고생을 하여야 인민들이 더 편한 생활을 누릴수 있다는 헌신적복무정신, 목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인민에게 충실한 심부름군으로 살리라는 각오가 육체적한계를 초월하게 하였던것이다.
퇴원후 운신하기 어려운 속에서도 은덕원개건에 초인간적인 힘을 바친것도 바로 그래서였다.외부벽체정면에 대형전광판을 설치하고 의자들까지 놓은 은덕원에 밤에도 즐겨찾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는 무심히 스치지 않았다.어두운 곳에서 밝은 화면을 보느라면 시력이 떨어질수 있으리라는 걱정에 자기의 아픔은 아예 잊었다.
며칠후 투광등들이 설치되여 밤이면 주위를 대낮처럼 밝히였다.
일신의 아픔은 다 묻어두고 인민의 건강부터 생각하는 당일군의 진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밝히고 후덥게 해주었다.
하다면 이러한 헌신적인 복무기풍이 당일군이라면 저절로 생기는것인가.
우리 인민을
당 제7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설사 몸이 찢기고 쓰러진다 해도 언제 어디서나, 어떤 순간에나 변함없이, 사심없이 우리 인민을 높이 받들어 혁명앞에 충실할것을 맹약하시던
바로 그래서 그는 그처럼 사랑하던 두 딸을 한날한시에 잃은 슬픔을 묵새기면서 과수원건설과 은덕원개건공사에 온넋을 깡그리 쏟아부을수 있었으며
인민을 위한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친 한영식동무는 비할바없이 소중하고 큰것을 얻었다.북청군사람들의 인정을 받은것이다.
내가 책임진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다른 군인민들보다 못해서는 안된다, 인민이 바라는 일, 인민의 고충과 아픔을 덜어주는 일이라면 돌우에도 꽃을 피워야 한다는 각오로 심신을 다 바쳐온 그를 군인민들은 우리 군당책임비서라고 부르며 존경한다.
우리 군당책임비서,
이 부름은
오로지 군인민들의 웃음과 행복을 위해 인생의 모진 고초를 완강하게 이겨온 한영식동무의 고결한 인민관, 헌신적복무정신은 전당의 책임비서들에게 깨우쳐주고있다.
당중앙의 지역적보좌관으로서의 고귀한 사명을 다하려면, 인민이 인정하는 진짜배기 충실한 심부름군이 되려면 자신을 깡그리 바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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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업을 강화하고 지방경제를 발전시키며 인민생활을 개선하는데서 시, 군당책임비서들에 대한 당중앙의 기대는 대단히 크다.
전국의 시, 군당책임비서들이 한영식동무처럼 숭고한 리상과 인민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무정신, 사회주의건설의 지역적거점을 책임진 일군다운 조직전개력과 실무능력, 고상한 도덕풍모를 지니고 백배, 천배로 분투할 때 모든 시, 군이 당과 국가를 옹위하는 억척의 초석, 인민의 락원으로 전변되게 될것이다.
본사기자 김향란
본사기자 리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