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9월 20일 금요일  
로동신문
농촌마을 련속기행
농촌진흥의 새시대에 산천도 사람도 몰라보게 달라진다
평안북도, 자강도, 량강도의 농촌마을들을 찾아서

2024.5.4. 《로동신문》 4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농촌의 면모와 환경을 개변시키자면 농촌살림집과 공공건물들의 주변에 과일나무와 수종이 좋은 나무들을 많이 심어 록화를 잘하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서북부에 위치하고있는 평안북도와 내륙의 산간지대인 자강도, 량강도는 나란히 지경을 잇고 길이 이어진 도들이다.농촌진흥의 새시대가 펼쳐지고있는 사회주의농촌마을의 새 풍경들을 탐방하는 우리의 기행길은 자연히 지경과 길이 잇닿은 이 도들을 한방향으로 선택하게 하였다.

자연지리적조건에서 큰 차이가 있는 이 지역들의 농촌마을원림경관은 저마끔 달랐지만 받아안게 되는 감흥은 어디서나 꼭같았다.

위대한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현대적인 농촌마을들의 건설에서 원림경관을 조성하는 사업을 그토록 중시하는 우리 당의 정책은 산천도 사람도 얼마나 몰라보게 전변시키고있는것인가.

당과 국가가 품을 들여 지어준 현대적인 문화주택마을을 공원처럼 꾸리면서 그 주인들이 깨달은것, 산천도 사람도 몰라보게 달라진 그 마을들에 대한 기행길에서 우리가 감동깊게 체감한것은 무엇인가.

 

수림화, 원림화의 본보기적인 사회주의리상촌들

 

《우리 도의 농촌마을원림경관들의 특징을 알자면 아마 운산군의 답상농장부터 가보아야 할겁니다.전국적인 본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안북도에 대한 기행의 첫 목적지는 도당위원회에서 들은 이 말에 의해 정해졌다.

먼길을 달려 농장소재지마을로 들어가는 동구길에 이르니 길량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수삼나무들이 먼저 우리의 눈에 확 안겨왔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길을 〈수삼나무거리〉라고 부르는데 우리 도에서도 보기 드문 풍경입니다.》 하고 동행한 군일군인 지광일동무가 이야기하였다.

빨리 자라고 병해충견딜성이 강하여 가로수로 좋은 수삼나무로 자기 고장의 입구를 장식한 답상리사람들의 심정이 가슴뭉클 안겨오는 동구길이였다.

답상농장마을의 광경은 듣던것보다 더 감탄스러웠다.문화주택의 3층베란다를 넘겨다보는듯한 큰 소나무와 느티나무, 봇나무들이며 다양한 꽃관목들, 푸른 잔디밭들이 소층, 단층살림집들과 조화를 이룬 농장마을은 한폭의 그림마냥 아름다왔다.

전국적인 보여주기사업을 할만하다고 감탄하는 우리에게 군일군은 지난해 봄부터 농장마을과 주변의 산들에 심은 나무는 무려 30여종에 50여만그루나 된다고 특히 올해 심은 큰 나무는 수천그루에 달한다고 하면서 그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당에서 왜 나무심기도 과학적으로 해야 사름률을 높일수 있다고 늘 강조하고있는지 실체험으로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고 하는것이였다.나무심기에서 나서는 기술적요구들을 하나하나 알기 쉽게 말하는 그의 설명은 마치도 원림전문가의 해설같았다.

마치 원림전문가같다는 우리의 말에 지광일동무는 《당정책대로 나무를 잘 심자면 일군들부터 박식해야 한다는것이 군당위원회의 요구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을주변을 빙 둘러싼 사과나무는 1 100여그루나 되였다.그 나무들에 사과꽃이 만발할 때면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의 노래가 저절로 울려나올 사과나무동네였다.그 사과나무들을 심던 이야기를 나누며 리일군과 걸어가는데 어느 집뜰안에서 과일나무를 가꾸느라 여념이 없는 로인부부가 눈에 띄였다.

《대단한 과일나무애호가로인들인데 저 집만 해도 우량품종의 과일나무들이 아마 20그루는 잘될겁니다.》

리일군이 말하기를 지금 집집마다 과일나무들을 더 많이 심는 경쟁이 벌어지고있는데 그 열성에 새집들의 풍경이 더 몰라보게 달라지고있다는것이였다.농촌살림집주변에 과일나무와 수종이 좋은 나무들을 10~15그루씩 심을데 대한 당정책을 자기자신을 위한 일로 받아들인 새 마을의 주인들의 마음속에서 벌써 행복의 열매가 주렁지고있다는 생각에 우리의 마음도 흥그러워졌다.

마을앞에 나서니 이번에는 또 다른 풍경이 우리를 맞아주었다.번듯하게 정리된 불경천의 동뚝에는 무려 1만여그루의 참대버드나무가 빼곡이 자라고있었고 그 너머에는 수천그루의 상원뽀뿌라나무를 심은 양묘장이 바라보이였다.

우리가 본것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원림경관만이 아니였다.자기 고장의 모든 산을 황금산으로, 자기 땅의 모든것을 보물로 만들려는 애국의 마음들이 마치도 무성한 숲을 이루고있는듯한 광경이였다.

농촌마을의 원림록화를 잘할데 대한 우리 당정책이 동구길에서부터 집뜨락과 휴식터, 앞뒤산과 동뚝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깊이깊이 심어진 수림화, 원림화의 본보기적인 마을이였다.

우리의 다음목적지는 선천군의 솔재농장이였다.아직 농촌살림집건설이 한창이라는 이곳에서 어떤 원림경관을 볼수 있다는것인지 군일군들의 말에 의아했던 우리의 의문은 농장에 들어서자마자 대번에 풀리게 되였다.

수종이 좋은 큰 나무들이 푸르싱싱 잘 자라고있는것을 비롯하여 벌써 원림록화는 높은 수준에서 실현되여 머지않아 새집들이경사를 맞게 될 농장마을의 모습을 더욱 훌륭하게 장식해주고있었다.

제2작업반마을의 어구에 들어설 때였다.어디선가 울려오는 유정한 까치의 울음소리에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두달전에 심었다는 소나무에 어느새 벌써 보금자리를 편 한쌍의 까치가 날아예고있었다.감탄이 절로 튀여나왔다.솔재라는 고장이름답게 큰 소나무들을 적지 않게 심은 이 마을에는 저런 새 까치둥지가 한둘이 아니였다.

새 살림집의 주인들보다 새들이 먼저 날아와 보금자리를 편 이채로운 광경은 농촌마을의 원림경관조성에서 큰 나무를 많이 심을데 대한 우리 당의 정책이 낳은 멋들어진 풍경이였다.군일군인 김성범동무는 이야기하였다.

《이 나무들은 군산림경영소와 군원림사업소의 큰 나무재배장에서 자래운것들입니다.그 재배장이 아니였다면 이런 풍경도 없었을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서둘러 군원림사업소의 큰 나무재배장으로 향하게 하였다.큰 나무들을 재배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그곳에는 수종별로, 나이별로 구획이 명백하게 지어진 규격포전들이 주런이 펼쳐져있었고 포전마다에는 10여종에 5 300여그루나 되는 큰 나무들이 꽉 차있었다.

군원림사업소의 일군은 바로 이곳에서 얼마전 도적인 보여주기사업이 진행되였는데 큰 나무재배와 관련한 경험과 지식을 전수받은 일군들속에서 반향이 대단했다고 하였다.군당위원회에서 재배장꾸리기사업을 떠밀어주던 이야기를 감동깊이 들려주면서 그는 이제는 농촌살림집원림록화에 필요한 큰 나무들을 얼마든지 자체로 보장할수 있다고 장담하는것이였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원림양묘장에서도 들을수 있었다.

양묘장에서는 금잎수삼나무, 금잎회화나무, 가지삽목에 의한 방법으로 자래운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100여종에 달하는 원림록화용나무모들과 잔디플록쓰도 재배하고있었다.이제 한두해후이면 이 나무모들이 새로 일떠서는 농장마을은 물론 읍지구의 원림경관조성에 대대적으로 리용된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군의 원림록화사업을 위해 애쓰고있는 이곳 일군들의 노력을 가슴뜨겁게 안아볼수 있었다.

이런 사회주의리상촌의 풍경들은 과연 어떻게 태여나는가.

사회주의리상촌이란 결국 당정책이 현실로 꽃펴난 마을이다.그 마을들의 전변은 당정책을 받들고 실천하는 주인들의 집행정신이 오늘의 시대의 높이에 올라설 때 이룩될수 있음을 다시금 절감케 하는 우리의 기행길이였다.

 

선경의 새 마을엔 봄도 빨리 온다

 

평안북도와 이웃하고있지만 자강도는 역시 산간지역이라 계절도 한발 뜨다고 여겼던 우리의 예상은 자강도기행길의 첫 목적지인 희천시 지신남새농장마을에서부터 뒤집혔다.평안북도의 새 농촌마을들에서 본것 못지 않은 봄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역시 농촌문명창조의 본보기로 온 나라에 소문난 곳이 달랐다.

앞에는 맑은 물 출렁이는 지신천을 안고 뒤에는 푸른색으로 단장된 산을 업은 명당자리에 들어앉은 마을은 척 보기에도 남다른데가 있었다.거기에 자연기복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원림경관은 그야말로 산과 강기슭에 펼쳐진 아름다운 꽃바다를 련상시키였다.

희한하게 전변된 마을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우리에게 농장일군은 이 고장의 지명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것이였다.

해방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쑥대와 가라지가 무성하여 가라지마을로 불리웠다고 한다.이런 마을이 오늘은 누구나 찾아와 감탄을 금치 못해하는 공원속의 마을로 변모되였으니 이 아니 천지개벽이라고 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우리는 원림록화가 훌륭히 실현된 지신고급중학교에도 들려보았다.몇해전 현지지도의 길에서 학교를 찾아주신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우리 나라 학교들가운데서 본보기로 될수 있게 잘 꾸리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고 교장은 절절히 이야기하였다.학교구내에는 흰말채나무와 명자나무, 금잎회화나무를 비롯하여 수십종의 원림식물들이 있어 풍치를 살려주는것은 물론이고 학생들에게 원림지식도 주는 좋은 교양마당으로 되고있었다.

각종 과일나무들이 들어찬 작업반마을들을 돌아보고 농장을 떠나는 우리의 귀전에 사회주의리상촌으로 훌륭히 꾸려진 새 마을에 우리 원수님을 꼭 모시고싶다는 이곳 사람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메아리쳐왔다.

지신남새농장마을을 떠난 우리가 강계시 은정남새농장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그곳에서 우리는 느티나무들이 바람결에 설레이고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강계시와 같이 기온이 낮은 지역에서 느티나무를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것이다.우리의 생각을 알았는지 농장일군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감명깊었다.

농촌마을들에 느티나무를 많이 심어 문명한 사회주의문화농촌의 풍경이 더 잘 살아나게 할데 대한 당정책이 제시되였을 때 시일군들의 생각은 깊었다.당의 뜻을 받들려는 뜨거운 마음이면 여기서도 느티나무가 자라게 할수 있지 않겠는가.하여 전문가들과의 수십차의 협의끝에 얼굼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우면서 각종 뿌리성장촉진제를 도입한 결과 이렇게 수십그루의 느티나무들이 마을에 뿌리내려 풍치를 돋구어줄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잠시후 날은 어두워졌으나 곳곳에 불을 켜들고 당면한 영농사업을 다그치는 농업근로자들의 모습이 우렷하게 안겨왔다.고장이름그대로 당의 은정을 한시도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답으로 수놓아가는 훌륭한 애국자들이 사는 마을이였다.떠나기 아쉬운 마음을 안고 우리는 느티나무로 인상깊고 고장이름으로 여운이 깊은 은정남새농장마을을 떠났다.

강계시에서 하루밤을 보낸 우리가 장강군 장평리를 찾은것은 이른아침이였다.봄빛이 완연한 마을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바께쯔를 비롯한 작업도구들을 들고 떨쳐나 원림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와 만난 리의 일군은 새 농촌마을이 일떠서고 처음으로 맞이한 봄이여서 그런지 올해 봄은 더 빨리 찾아온것같다고 하면서 마을의 여러곳을 안내해주었다.

산골특색이 잘 살아나는 각종 나무들과 꽃관목이 조화롭게 어울린 마을의 봄풍경앞에서 우리는 농촌진흥의 위대한 새시대에 계절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달라져야 함을 가슴벅차게 느낄수 있었다.이런 리상촌들에 어찌 산골이라고 봄이 늦게 온단 말인가.

정녕 희한하게 전변된 마을에서 우리가 본것은 달라진 산천만이던가.자기 고향을 제손으로 더 아름답게 가꾸어가려는 주인들의 향토애가 커가고 애국으로 단결하며 당정책을 관철해나가는 이들의 달라진 일본새였다.

량강도에서도 우리는 산골특색의 원림경관들을 볼수 있었다.

우리가 김형권군 직설축산농장을 찾았을 때 종비나무와 봇나무를 비롯한 큰 나무들과 산과일나무들이 마을을 꽉 채우고있는 모습이 참 장관이였다.량강도의 특색이 살아나는 원림경관이였다.

농장소재지입구에 종비나무로 《농촌진흥》이라는 글발을 형상한 곳에서 우리와 만난 농장일군은 이렇게 말했다.

《농촌진흥의 새시대는 우리 마을에도 문명의 봄을 안아왔습니다.》

자연지리적차이는 있어도 당정책이 꽃피워주는 현실과 당정책을 받들어가는 마음이 하나같은 내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농촌진흥의 위대한 새시대의 봄은 한날한시에 꼭같은 전변의 우뢰를 울려주고있었다.

* *

사실 우리가 편답한 평안북도와 자강도, 량강도에로의 기행길은 결코 생소한 길이 아니였다.이미전에 많이 걸어본 취재길이였고 낯익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고장이였건만 가는 곳마다, 들리는 곳마다 새롭게 느껴지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산천도 그 산천이고 고장도 그 고장이건만 당의 새로운 농촌혁명강령이 펼친 눈부신 변혁에 의해 새롭게 태여난 농촌마을들이여서 그곳을 찾아가는 우리의 기행길도 새길처럼 느껴지고 흥분도 새로왔던것이다.이런 길들이 합쳐지고 이어지면 우리 당이 구상하는 농촌진흥의 새시대가 앞당겨지지 않겠는가.그래서 위대한 창조와 변혁의 새시대에 우리의 취재길은 언제나 보람차고 충격적인것이다.

글 본사기자 박현

본사기자 유광진

사진 오진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