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28. 《로동신문》 6면
지난 4월 어느날, 밤은 깊어갔으나 온성군 읍에 살고있는 영예군인 조광철동무는 화판앞을 떠나지 못하고있었다.몇달을 고심하며 완성한 그림이였지만 선듯 붓을 뗄수 없었다.그것은 조광철동무가 제대되여 6년만에 그린 첫 그림이였다.
한 영예군인을 둘러싸고 밝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진 그림을 이윽토록 바라보는 그의 눈앞에 지나온 나날들이 떠올랐다.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사회제도입니다.》
학생시절부터 미술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던 조광철동무는 인민군대에 입대하여서도 그림을 잘 그려 전우들로부터 병사화가로 불리웠다.그러던 그가 뜻하지 않은 일로 전신마비라는 진단을 받고 고향에 돌아온것은 몇해전이였다.
그때 그를 괴롭힌것은 육체적고통만이 아니였다.앞으로 조국의 벅찬 숨결을 화폭에 담아가는 미술가가 되려던 꿈을 영원히 실현할수 없다는 안타까움이였다.이런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랑과 정을 기울이였다.군의 책임일군들과 마을사람들이 친혈육이 되여 따뜻이 돌봐주었고 나어린 소년단원들까지도 자주 찾아와 노래도 불러주며 힘을 안겨주었다.평범한 영예군인에게 와닿는 사회적혜택은 또 얼마나 뜨거웠던가.
지금도 조광철동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은 경성온천료양소에서 료양치료를 받던 날들을 잊지 못하고있다.
료양소에 입소한 그날부터 그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였다.그들중에서도 영예군인의 치료를 직접 담당한 고려치료실 의사 석원화동무의 정성은 참으로 극진하였다.
그는 40여년간 료양소에서 일하면서 많은 영예군인들과 로병, 장애자들의 건강을 회복시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있는 의료일군이였다.신심을 잃지 말고 치료를 잘하면 얼마든지 미술가가 되려는 꿈을 꼭 이룰수 있다며 그가 기울인 진정을 다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었다.
년로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영예군인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고려치료와 함께 수법치료를 배합하며 과학적인 치료대책을 세우느라 밤을 지새우던 일이며 짬시간에도 쉬지 않고 그의 입맛을 돌려세우기 위해 애쓰던 일…
그만이 아니였다.온 료양소의 의료일군들과 종업원들이 의사가 되고 간호원이 되여 진정을 바쳤다.그런 나날속에 조광철동무는 마침내 침상에서 일어나게 되였고 그처럼 소원하던 붓을 다시 잡을수 있었던것이다.
료양소를 떠나던 날 멀리까지 따라나서며 바래워주는 의료일군들에게 조광철동무는 이렇게 진정을 터놓았다.
고마운 사회주의제도를 화폭에 담아 온 세상에 자랑하겠다고.
그 마음을 담아 조광철동무가 그린 그림이였다.
한 영예군인의 작품에는 조국보위초소에서 피흘린 영예군인들을 높이 떠받들어주는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고마움과 그 품을 위해 병사시절처럼 생의 순간순간을 빛나게 이어가려는 맹세가 어려있었다.
본사기자 송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