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9월 13일 금요일  
로동신문
사회주의근로자로 떳떳이 살자!
자식들에게 무엇을 물려줄것인가

2024.6.7. 《로동신문》 4면


나는 집안에 정히 간수한 아버지의 사진을 자주 꺼내보군 한다.

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당원돌격대에 입대하여 로동당시대의 기념비적건축물들을 일떠세우는 영예롭고 보람찬 사업에 참가하였다.사진에 새겨진 그 시절의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어떤 삶이 사회와 집단, 후대앞에 떳떳한가를 새겨주는 더없이 귀중한 교본과도 같은것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후회가 없이 떳떳하게 살고 부끄러움이 없이 아름답게 사는것이 우리 시대의 참된 삶입니다.》

어린시절에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을 무척 부러워했다.학창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학급동무들이 새 필기도구나 축구공, 배구공 같은것들을 가지고와서 자기 아버지가 출장갔다가 가져다준것이라고 자랑할 때면 어린 나의 마음속에도 그런 다심한 사랑을 받아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자리잡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쩌다 한두번 그것도 출장길에 잠간 집에 들리군 하였다.그럴 때면 너무도 오래간만에 만나보군 하는 아버지여서 그런지 반가움보다 어려움이 마음을 짓눌렀다.지어 서먹서먹하기까지 했다.

허나 아버지는 그러거나말거나 덥석 안아주며 앓는데는 없는가, 공부는 잘하는가고 묻군 하였다.다음날 아침에 깨여나보면 아버지는 벌써 떠나간 뒤였다.그래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쩌다 집에 들어와서도 왜 우리와 놀러 갈 생각을 하지 않는가고 한바탕 투정질을 해댔다.어린시절에는 정말 리해할수 없는 아버지였다.

늘 가정과 떨어져사는 아버지와 언제한번 따뜻한 정을 나누어보지 못한 나는 점차 크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고까운 생각만 가지게 되였다.혼자서 가정살림을 돌보고 자식들을 키우느라 누구보다 고생이 많은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아프게 안겨올수록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품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나는 어느한 단위에 배치받았다.하지만 나는 안착되여 일을 잘하지 못하였다.아버지처럼 가정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한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하면서 제 리속만 차리기 위해 들떠다녔다.그래서 어머니에게는 직장에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여기저기로 분주하게 돌아쳤다.그러다가 결국은 본의아니게 과오를 범하고 법적제재를 받게 되였다.

사람들앞에 머리를 들고 나설수 없어 깊은 밤 골목길로 집에 들어온 나를 눈물이 그렁해서 바라보던 어머니는 문득 아버지의 편지들을 보여주었다.그것은 아버지가 돌격대생활기간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들이였다.

편지에는 자식이 몰라보게 커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이 깊어진다, 자기라고 왜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에서 살고싶지 않겠는가, 함께 들놀이도 가고싶고 놀이감도 만들어주며 정을 부어주고싶다, 그러나 자식의 눈가에 떳떳한 모습을 새겨주어야 하겠기에 힘들어도 그길을 간다, 아들이 먼 후날 자서전에 부모들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써넣을수 있도록 항상 자신을 다잡으며 일하겠다고 씌여져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이 아들의 눈동자에 떳떳한 모습을 새겨주기 위하여 정든 집을 멀리 떠나 한생을 늘 건설장에서 살다싶이 하였는데 나는 젊은 시절에 자기만을 위해 뛰여다니다가 벌써부터 떳떳치 못한 과거를 가지게 되였으니 한생토록 성실한 애국의 땀을 바친 아버지앞에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하여 나는 고원군염소목장에 탄원하였다.당시 목장에서는 많은 염소젖을 생산하여 군안의 탁아소와 유치원어린이들에게 공급하고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남은 청춘시절을 보람차게 보낼 결심을 품고 염소방목을 시작하였다.수십리나 되는 험한 산발을 매일과 같이 오르내려야 하는 힘겨운 방목길이였지만 나는 남보다 먼저 염소떼를 몰아갔고 늦게야 목장으로 돌아왔다.그 과정에 염소의 생리적특성에 대해 깊이 파악하며 방목의 묘리를 터득하였다.

하지만 한번 품은 결심을 굽히지 않는다는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온 한해 명절날, 휴식일이 따로 없고 온통 산으로 둘러막힌 이곳에서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고 하면서 일부 종업원들이 목장을 떠나갈 때면 나의 마음속에서도 저도 모르게 동요의 물결이 일어번지군 하였다.

그때마다 어디선가 이제 돌아서면 후회밖에 남을것이 없다고, 떳떳하게 살자면 마음을 굳게 가다듬고 앞으로만 가야 한다고 타이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것만 같아 자신을 다잡군 하였다.

나는 결혼한 후에 안해도 방목길에 세웠다.먼 후날 자식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는 당이 바라는 한길만을 걸었다고 긍지높이 이야기해주자는 약속을 나누며.

어느덧 나에게도 자식이 생기였다.비내리는 나무밑에서, 눈발날리는 골짜기의 바위우에서 점심밥을 들 때면 집에 홀로 있을 어린것의 모습이 눈앞에 어려와 목이 메이군 하였다.그러면 불현듯 어쩌다 집에 들어와서도 우리와 몇마디 말도 나누어보지 못하고 건설장으로 떠나군 하던 아버지의 심정도 그러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좀 진정되군 하였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그것은 오직 당의 뜻으로만 살고 조국을 위해 성실히 일하는데 인생의 참된 보람이 있다는 생활의 진리였다.그처럼 귀중한 인생의 재부가 또 어디 있으랴.

하기에 나는 아버지처럼 자기의 떳떳한 모습으로 자식들에게 그런 참된 삶의 진리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안고 힘겨운 방목길을 꿋꿋이 이어갔다.그길에서 나는 작업반장이 되였고 국가수훈의 영예도 지니였다.

나는 앞으로도 나라를 위해, 사회와 집단을 위해 자신을 바쳐가는 모습을 자식들의 눈동자에 깊이 새겨주어 그애들도 참된 삶은 헌신으로 빛난다는 소중한 진리를 가슴깊이 새겨안고 인생길을 곧바로 가도록 이끌어주겠다.

고원군염소목장 작업반장 박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