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9월 20일 금요일  
로동신문
실화
천마동의 작은

2024.6.17. 《로동신문》 6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누구나 보석과 같은 애국의 마음을 간직하고 조국의 부강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유익한 일을 스스로 찾아하여야 합니다.》

청진시 신암구역 천마동 29인민반은 생소한 곳이였지만 비타민나무집을 찾기는 그닥 어렵지 않았다.동근방에 이르러 물으니 길가던 사람마다 제가 안다며 친절히 대주었던것이다.마침내 나지막한 산기슭에 자리잡은 단층마을의 맨 꼭대기집에 이르렀다.크지 않은 이 집에서 수십년세월 터밭에서 자래운 수천그루의 비타민나무모를 전국의 여러 단위에 보내주었으며 지금은 제손으로 만든 비타민나무열매즙을 청진애육원과 육아원, 초등학원, 중등학원 원아들과 인민군군인들에게 보내주고있다는 박상운, 방연옥로인내외가 살고있었다.

이윽하여 우리는 비타민나무꽃들이 활짝 피여난 터밭옆에서 방연옥로인과 마주앉았다.박상운로인은 아침일찍 비타민나무열매로 만든 음료를 가지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주변구분대를 찾아갔던것이다.

방연옥로인은 자기들이 무슨 큰일을 했다고 평양에서 먼길을 왔는가고 하면서 몸둘바를 몰라하였다.그리고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편이 처음 집에 비타민나무모를 안고 들어온것이 아마 수십년전 4월쯤 될겁니다.어느날 평양에 출장갔다가 돌아와서는 느닷없이 비타민나무모들을 심자고 하는 남편의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나에게 남편은 비타민나무의 유익성에 대해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비타민나무에는 여러가지 약 및 영양성분이 많이 들어있다는것, 열매에는 각종 비타민성분들이 풍부히 들어있어 이 나무를 〈종합비타민창고〉라고 부르고있다는것, 또한 빨리 자라면서도 추위와 병견딜성이 강하며 토지개량에도 효과적이라는것 등을 말이우다.

한참 남편의 말을 듣던 나의 입에서는 허구픈 웃음이 새여나왔습니다.그때 우린 덩실한 다층살림집에서 살고있었는데 빈땅이 어디에 있어 나무를 심고 더우기 남편은 당시 사회안전기관에서 복무하고있었답니다.그러는 나에게 남편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디다.출장길에서 비타민나무를 조국의 북변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애쓰는 한 연구사를 만났답니다.남편은 연구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비타민나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는데 특히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히 이름지어주신 〈비타민나무〉위대한 장군님께서 온 나라에 널리 퍼치여 인민생활향상에 이바지하도록 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는 뜨거운 사연을 전해듣고 솟구치는 격정을 누를수 없었다고 합니다.그래 연구사에게 나무모를 몇그루 달라고, 자기도 한번 심어보겠다고 했다나요.이렇게 되여 집으로 안고온 비타민나무모였습니다.

남편은 나에게 말했수다.

〈물론 안전원인 나에게 누구도 비타민나무를 재배하라고 요구한것은 없소.하지만 당에서 우리 인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그토록 마음쓰고있는데 자기 부문의 일이 아니라고 팔짱을 껴야 옳겠소.여보, 빈땅은 아빠트주변에 얼마든지 있고 기술은 배우면 되지 않겠소.〉

이쯤되면 남편의 고집을 꺾을수가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난 하는수없이 응했답니다.

그날부터 남편은 하루일이 끝난 밤이면 비타민나무재배에 대한 책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연구기관에 찾아가기도 하면서 재배기술을 배워나갔답니다.

아빠트주변의 빈땅에 심은 비타민나무는 웬일인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우린 몇해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끝내 비타민나무가 뿌리를 내리게 했수다.

어느해 5월이였습니다.남편이 집에 뛰여들어와서는 비타민나무꽃이 폈다고 하는것이 아니겠소.그래 밖으로 달려나갔습니다.도대체 어떻게 생긴 꽃인지 보고싶었거든요.그런데 인차 실망했습니다.아니 글쎄 비타민나무꽃이라는게 눈에도 차지 않을 정도로 작았고 별로 향기도 느껴지지 않더라니까요.게다가 꽃이 인차 진다는 남편의 말에 흥심이 사그라집디다.

〈이 꽃은 오직 열매를 위해 피여나오.열매를 위해 피여나는 비타민나무꽃처럼 우리도 나라를 위해 참답게 인생을 살자구.〉

그때까진 남편의 그 말에 담긴 깊은 뜻을 다는 몰랐수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비타민나무들도 해가 다르게 자랐습니다.나날이 키돋움하는 비타민나무들을 보며 나는 좋아서 그러는데 왜서인지 남편의 얼굴에는 점점 수심이 짙어갔습니다.밤에는 이리 궁싯 저리 궁싯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수다.이런 일이 며칠동안 지속되였답니다.처음에는 년로보장을 받은 후의 고민일거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여겨보니 그런것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 어느날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그러자 남편은 깊은 한숨을 내쉽디다.

〈비타민나무들을 더 많이 심어야겠는데 우리집 주변에는 빈땅이 더는 없구만.여보, 우리 이 집을 단층살림집과 바꾸는것이 어떻소.〉

나는 혹 잘못 듣지 않았나 했는데 날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은 너무도 진중했습니다.

난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래 당신은 다 큰 두 아들이 안보이는가고, 지금껏 당신 하자는대로 다 해왔지만 이번만은 안된다구요.그러던 나는 당신이야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는가라는 남편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말았습니다.

해방전 빈농의 가정에서 일곱남매의 넷째로 태여난 남편의 생활은 참 눈물겨웠습니다.시아버지는 일제에게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을 한달 앞두고 눈을 감았고 시어머니 홀로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키우느라 무슨 고생인들 없었겠습니까.

해방이 되여서야 시름놓고 사람답게 살았답니다.그런데 행복하게 살아보자니까 이번에는 미국놈들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당시 남편의 나이는 11살이였는데 지금도 그때를 돌이켜보면서 준엄한 전쟁시기 조국의 고마움을 제일 뼈저리게 절감했다고 말하군 합니다.준엄한 전쟁시기에도 남편은 하루도 끊기지 않은 배움의 종소리를 들으며 공부했지요.남편의 가슴속에는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이 소중히 간직되였답니다.그래서 혁명의 군복을 입었수다.남편의 준절한 타이름이 나의 귀전에 계속 들려옵디다.

〈그래 우리가 사는 집이 어디 당신이나 내가 돈주고 산 집이요.나라에서 돈 한푼 받지 않고 배정해준것이 아니요.나나 당신이나 다 나라의 은덕으로 이날이때껏 살아왔는데 보답한것이 무엇이 있소.〉

나는 고개를 수그렸습니다.그제서야 비타민나무꽃에 대해 이야기하던 남편의 심중이 리해되였습니다.

얼마후 우리는 해당 기관에 의뢰하여 아빠트에서 이 단층살림집으로 이사를 했고 지금은 이렇게 집주변에 비타민나무를 심고 자래우고있습니다.

솔직히 그때 친척들은 물론 일부 사람들이 아빠트에서 단층집으로, 큰집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가는 우릴 두고 머리를 기웃거렸답니다.자식들도 처음엔 부모의 심정을 리해 못했수다.그래도 나와 남편은 묵묵히 비타민나무를 재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터밭에는 자그마한 양묘장이 생겨났고 집주변의 빈땅에는 모조리 비타민나무를 심었습니다.

어느날 구역당책임일군이 나무재배에 필요한 자재들을 한가득 싣고 집에 찾아왔습니다.책임일군이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소문없이 정말 좋은 일을 한다고, 비타민나무를 많이 심어 온 마을, 온 구역을 비타민나무숲으로 뒤덮게 하자고 이야기할 때 우린 아이들처럼 울었수다.낳은 자식들도, 친척들도 리해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당에서는 속속들이 헤아리고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후 구역당에서 우리 부부를 급히 찾는다는 련락이 왔습니다.무슨 일일가 하고 가니 구역당책임일군이 우리를 회의실의 주석단에 내세우고 많은 일군들에게 우리가 한 일을 자상히 알려주는것이 아니겠습니까.그러면서 이 가정을 잘 도와주자고 뜨겁게 호소하던 책임일군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가에 쟁쟁합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비타민나무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습니다.》

* *

마을사람들속에 섞이여 환한 웃음을 벙글써 지은 박상운로인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해빛에 탄 구리빛얼굴에 가로지나간 굵은 주름들은 그가 여든을 훨씬 넘긴 몸임을 말해주고있었다.

수십년전 로인이 《열매를 위해 피여나는 비타민나무꽃처럼 우리도 나라를 위해 참답게 인생을 살자구.》라고 한 말이 금방인듯 귀전을 쳤다.

우리에게는 비타민나무속에 묻힌 천마동의 작은 집이 조국을 위해, 후대들을 위해 여생을 깡그리 다 바치는 로인내외의 뜨거운 마음이 흘러넘치는 큰집으로 의미깊게 안겨왔다.

이 집과 더불어 로인내외가 걸어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생의 자욱마다에는 애국을 의무와 량심으로 간주하고있는 우리 인민의 숭고한 정신세계가 아름다운 빛을 뿌리고있었다.

본사기자 신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