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9월 20일 금요일  
로동신문
인민이 사랑하는 보건일군
40여년세월 료양생들의 회복치료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바쳐온 경성온천료양소 의사 석원화동무에 대한 이야기

2024.7.1. 《로동신문》 5면



경성온천료양소에 수많은 사람들이 쉽지 않은 보건일군이라고 부르는 한 녀의사가 있다.

고려치료실 의사 석원화동무이다.보건일군으로서 40년이상의 사업년한도 감동적이지만 더욱 놀라운것은 많은 난치성질병환자들을 치료하여 초소에 다시 세워주었다는 사실이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초소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학시절부터 소문난 녀자배구주장이였던 석원화동무는 늘 꿈꾸어왔다.앞가슴에 빛나는 금메달, 우승의 시상대에서 세계의 하늘가에 날리게 될 공화국기를.

그러했던 그가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뗀 곳은 료양소였다.몇년후에 그는 료양소에서도 제일 힘든 광천치료과로 자진하였다.매일같이 100여명의 료양생들에게 모래를 덮어주는 치료는 육체적부담이 컸지만 그는 기꺼이 맡아했다.료양생들을 위함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퇴소날이였다.《고맙습니다.선생님!》 하고 료양생들이 그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며 활기에 넘쳐있는데 한 청년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료양소정문을 나서는것이였다.어제날 설계가였던 그는 반신마비가 풀리지 않아 여전히 불편한 몸으로 료양기간을 마쳤던것이다.그에게 청년은 절절히 말했다.

《난 일하고싶습니다.》

석원화동무의 눈굽은 불시에 젖어들었다.청년은 단순히 육체적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보람찬 로동의 삶을 바라고있었다.

그날 그는 도무지 잠들수 없었다.전쟁로병이였던 아버지가 늘 외우던 말이 다시금 가슴을 쳤다.

《전쟁이 끝난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내 손으로 눈을 감겨준 전우들의 모습이 꿈에 보이군 한다.그때 내가 만일 위생지도원이 아니라 군의였다면 혹시 살려냈을지도 모를 그 끌날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정말 한스럽구나.》

료양소의 곳곳에 뜨겁게 아로새겨져있는 절세위인들의 사랑을 전하며 초급당비서가 들려주던 이야기도 새삼스럽게 귀전에 울리여왔다.

휴양소와 정양소, 료양소들을 복구건설하는것은 공장을 복구건설하는것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하시며 나라의 경제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휴양소와 정양소, 료양소를 복구건설하는데 필요한 자금과 자재는 무조건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하신 우리 수령님의 사랑은 얼마나 극진한것이였던가.

평소에는 례사롭게 여겼던 료양소의사라는 그 직업이 더없이 무겁게, 소중하게 간직될수록 그의 생각은 깊어졌다.

(료양소의사에게도 우리 당에서 그토록 귀중히 여기는 인민의 무병장수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저 청년과 같은 사람들은 당에서 나를 믿고 보내준 나의 환자들이다.)

땀과 지성만으로는 우리 당에서 바라는 진정한 정성의 높이에 이를수 없음을 사무치게 절감하며 그는 스스로 료양소의사의 한계를 벗어난 힘겨운 책임의 길을 선택하였다.고려의학을 발전시키면 신의학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도 고칠수 있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는 그를 새 학문탐구의 길로 떠밀었다.그는 낮에는 료양생들속에, 밤에는 책속에 파묻혀살았다.

그의 손을 거쳐 침상에서 벗어날수 없다던 많은 사람들이 벅찬 새 생활에로, 보람찬 로동의 일터에로 뛰여들었다.김정숙료양소(당시)에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석원화동무를 찾아오는 료양생들이 날로 늘어났다.

20년전 어느날엔가는 전신마비로 담가에 실려 료양치료를 받으러 온 21살의 특류영예군인청년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간절한 기대에 넘친 실날같은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선생님, 소원입니다.사륜차에라도 한번 앉아보게 해주십시오.》

창백하고 병약한 그의 몸에서는 생의 불꽃이 점점 사그라지고있었다.너무도 때가 늦은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뇌리를 치는것이 있었다.그에게도 그 영예군인또래의 아들이 있었다.

(만일 이 영예군인이 나의 아들이라면 현대의학이 포기하였다고 어머니도 포기하였겠는가?)

석원화동무는 영예군인을 와락 품어안았다.

《내가 꼭 일으켜세우겠어요.》

그는 집도 잠도 다 잊었다.무서운 정열로 영예군인의 치료에 달라붙었다.이른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가 세운 치료계획은 드팀없이, 중단없이 집행되였다.그는 늘 뛰여다녔다.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료양생들은 영예군인 한사람만이 아니였던것이다.

밤이면 그는 자신을 치료했다.온 하루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퉁퉁 부어오른 손의 매 마디들이 참을수 없이 쏘군 했던것이다.손가락마다 침을 꽂고 뜸을 뜰 때면 그는 마음속으로 빌군 했다.

(래일은 제발 아프지 말아주려마.)

영예군인은 물론 누구도 알수 없었다.손이 닳도록 자기들을 치료해주는 의사선생님이 바로 그 손때문에 남모르는 아픔속에 온밤 잠 못든다는것을.환자들을 대하는 그의 얼굴빛은 언제나 밝고 따뜻했던것이다.

오늘은 일어설가, 래일은 일어설가.온기없고 가늘어진 영예군인의 다리를 매일같이 쓸어보며 그는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고심어린 낮과 밤이 이어지던 어느날 눈동자만 겨우 움직이던 영예군인이 목을 돌리기 시작하더니 그의 감각없는 다리에 피줄이 일어서기 시작했다.마침내 기다리던 날은 오고야말았다.영예군인청년이 제힘으로 일어섰던것이다.첫걸음마를 떼는 아기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이런가.석원화동무는 울며웃으며 웨치듯 진정을 터쳤다.

《어서 마음껏 이 땅을 밟아보세요!》

사륜차에 앉아만 보아도 한이 없겠다던 아들이 기적적으로 일어나 료양소를 나서던 날 영예군인청년의 부모는 그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옛날엔 은인들에게 머리태를 잘라 신발에 깔아드렸다고 했는데…》

은인!얼마나 귀중한 말인가.그런 말은 누구에게나 하지 않는다.하다면 내게 진정 생명의 은인이라 떳떳이 불리울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영예군인이 짚고가는 쌍지팽이가 아프게 비껴들수록 석원화동무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기어이 마음껏 대지를 활보하게 하리라고.

단풍이 지고 겨울도 가고 또다시 봄이 왔다.료양기간은 끝났지만 영예군인의 회복치료에 대한 석원화동무의 관심과 요구성은 더욱 높아졌다.어느덧 영예군인은 지팽이 하나만 짚고도 주저없이 걸을수 있게 되였다.10년후엔 그 지팽이마저 버린 영예군인이 떡돌같은 아들애의 아버지가 되였다.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영영 걸을수 없다던 사람을 일으켜 아버지로까지 되게 하였으니 그 료양소의사가 정말 명의요! 눈앞에서 기적을 봤수다.》

의사인 석원화동무도 환자가 되여 쓰러지는 그런 순간이 왔다.뜻밖의 일로 그의 몸에 점차 마비가 들어오기 시작했던것이다.정신이 아뜩해졌다.

(나도 남의 짐이 되여야 한단 말인가.)

이름할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부지불식간에 온몸을 휘감았다.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것은 몇해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목소리였다.

《주저앉지 마오.의사가 주저앉으면 환자들은 영영 일어나지 못하오.》

추억조차 괴로운 고난의 나날에 남편은 이렇게 그를 일으켜세워주군 했다.

풀뿌리조차 귀하던 그때 어느날 저녁엔가 집으로 들어서던 그는 부엌문을 열다말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글쎄 어린 두 아들애가 가마속의 백미밥 한그릇을 정신없이 퍼먹고있지 않는가.

료양소에서 생일을 맞는 한 영예군인을 위해 그가 한달전부터 한줌두줌 쌀을 모아 마련한 밥 한공기였다.환자에게는 무엇보다 혈육의 정이 가닿아야 하는것이다.이미 바닥난 밥공기를 보느라니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너희들은 몸도 성하고 곁에 어머니가 있지 않니.…》 하고 애들을 꾸짖다보니 누렇게 뜬 자식들의 얼굴이, 섧게 흘리는 그 눈물이 칼끝처럼 그의 가슴을 허벼냈다.그는 피가 나게 입술을 깨물었다.내가 과연 어머니가 옳은가?!

그날 밤 석원화동무는 남편과 조용히 마주앉았다.

《어머니구실이라도 바로하고싶어요.함께 일하던 동무들도 떠나가는데…》

이윽토록 말이 없던 남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을 믿고 먼길을 찾아오는 료양생들은 어떻게 하겠소?그들에게는 당신이 있어야 하오.애들에게는 내가 있지 않소.주저앉지 마오.》

그에게는 그때처럼 남편이 고맙고 돋보인적이 없었다.가정일로 발을 매이지 말라고 된장통도 흔연히 들고다니고 봄이면 자식들과 함께 쑥을 뜯어 말리워 손으로 비벼 가루까지 봏아 치료함에 차곡차곡 넣어주던 진실하고 뜨거운 남편이였다.그는 우리 수령님께서 자신께서 한 10년만 젊었어도 막장에 들어가 탄을 캐겠다고 하셨다는 교시를 가슴에 안고 자진하여 탄광일을 시작한 제대군인당원이였다.

(그이가 지금의 나약해진 나를 본다면 얼마나 섭섭해했을가.)

남편의 따스한 온기와 땀이 고이 어려있는것만 같은 쑥 한줌을 소중히 안아보는 석원화동무의 가슴속에서는 쉽지 않은 결심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그날부터 그의 온몸은 자신만이 아니라 그가 일으켜세워야 할 많은 료양생들을 위하여 말그대로 실험대상이 되였다.한장 또 한장 그렇게 그는 자기 몸에 무려 수천장의 뜸을 떴다.스스로 제 살을 태우고 침대를 꽂으며 끝내 팔의 신경을 살리는 치료방법과 함께 손가락, 손목, 발목의 신경을 되살리는 새로운 묘리를 찾아내고야말았다.마비환자들을 완치시키기 위한 치료에서는 커다란 전진이 이룩되였다.그것은 단순히 의학의 결실이 아니라 그의 고결한 헌신의 산물이였다.

그가 남을 위해 자기 몸에 낸 상처, 그것은 수십수백명의 아픔을 자기 한몸에 받아들인 헌신과 희생의 흔적이였다.그 대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소원하던 참된 인생의 자취를 새겨가고있으니 바로 그 모든 자욱들은 이 훌륭한 공산주의보건일군의 아름다운 삶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석원화동무가 료양소의사로 일하면서 제일 많이 들은 인민의 목소리-《고맙습니다!》, 바로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은인으로, 고마운 사회주의보건제도의 영상으로 간직된 그의 긍지높은 삶이 있다.그것은 40여년세월 참된 보건일군으로 살고있는 한 녀성애국자, 공산주의인간에 대한 인민의 평가인 동시에 그렇듯 훌륭한 보건일군들이 지켜서있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보건제도에 인민이 진심으로 드리는 인사인것이다.

우리의 취재과정에도 석원화동무는 조국땅 곳곳에서 반가운 소식들을 계속 받고있었다.

《선생님덕에 혁신자가 되여 영광의 기념사진까지 찍었습니다.》

《꿈같이 자식을 보았습니다.이름을 꼭 지어주십시오.》

《선생님이 일으켜세워준 우리 아버지가 여든번째 생일상을 받았습니다.》

우리 원수님께서 단 한명도 절대로 잃을수 없는, 잃어서는 안될 피와 살점과도 같이 여기시는 우리 인민의 무병무탈과 건강장수를 받들어 일흔을 바라보는 오늘에도 그는 료양소의사의 첫걸음을 떼던 그 나날의 열정을 안고 쉬임없이, 사심없이 헌신의 발자욱을 새겨간다.그는 말했다.

《우리 료양소를 나선 료양생들모두가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바라시는대로 무병무탈해서 나라일을 잘하고있다면 그이상 저는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조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