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7. 《로동신문》 4면
《전체 인민들은 전승세대처럼 일신상의 모든 고락을 조국의 운명과 결부시키고 애국의 길에 충정을 다 바치는 정신으로 전진도상에 가로놓인 난관앞에 과감히 나서야 하며 불요불굴하는 의지로 사회주의건설에 분투하여야 할것입니다.》
전쟁로병! 조국의 운명이 판가름되던 가렬처절한 3년간 값비싼 선혈로 전승을 안아온 빛나는 군공만으로도, 허리띠를 풀새없이 간고분투하며 전후복구건설과 천리마대고조시기, 사회주의건설에서 혁혁한 위훈을 세운 공로만으로도 그들은 만사람의 존경속에 여생을 편안히 보내야 할 사람들이다.그러나 그들속에는 군사복무가 끝났다고 하여, 년로보장을 받았다고 하여 로병의 의무를 잊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세대는 바뀌고 세월은 멀리 흘러가도 전승세대의 넋과 정신은 영원히 변함없어야 하며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의 몫까지 합쳐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것이 전쟁로병들의 고귀한 인생관이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교단에서, 일터에서 자기의 지혜와 땀으로, 강의한 신념과 의지로 새세대들에게 충실성의 산모범을 보여주며 한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참되게 살고있는 그들의 불같은 모습은 조국에 대한 충성과 복무의 길을 어떻게 변함없이 이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대답으로 된다.
한생토록 안고 사는 신념-당과 조국을 위하여!
그 나이이면 자식들의 부양을 받으며 집에서 생활하는것이 례상사이건만 그는 지금도 혈기왕성한 정열에 넘쳐 교단을 지켜가고있다.어느 하루도 번짐이 없이 매일 대학에 출근하여 교수사업과 연구사업으로 긴장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서도 지칠줄 모르는 탐구의 열정으로 새날을 맞는 그를 보며 사람들이 로당익장하는 비결에 대하여 물을 때면 그는 전쟁때 있은 일들을 들려주고나서 이렇게 마무리를 짓군 한다.
나야 전화의 그날처럼 살아야 할 전쟁로병이 아닌가고.
이 말속에는 전쟁시기 제2전선지대를 메주밟듯하며 맹렬한 적후활동으로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기고 피흘려 쓰러지면서도 손에서 무기를 놓을줄 몰랐던 그때처럼 살려는 로병의 불같은 각오와 의지가 담겨져있다.
지난해 그는 로화로 하여 한쪽눈을 잘 볼수 없게 되였다.이 사실을 알고 대학의 많은 일군들과 교직원들이 달려와 저마다 걱정하며 다시는 무리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지만 로병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실망감도 찾아볼수 없었다.
눈이 흐려진다고 마음까지 흐려져서야 되겠는가고, 아직 내가 할 일은 많다고 하는 김영황동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은 난관앞에 굴함을 모르는 로병의 강의한 정신력에 다시금 머리를 숙이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되였다.
돋보기를 낀 그가 확대경까지 리용하며 콤퓨터앞에서 연구사업에 몰두하고있는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겠는가고 하면서 확대경을 앗아내는 그들에게 김영황동지는 피발이 선 눈을 비비며 말했다.
《난 로병이요.나이가 많고 일이 힘들다고 하여 어떻게 로병의 의무를 저버릴수 있겠소.》
숨이 붙어있는한 당과 조국을 위하여 피와 목숨도 서슴없이 바치던 전승세대의 정신은 절대로 달라질수 없다고 하면서 한생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왔기에 김영황동지는 오늘도 드바쁘게 살며 일하고있는것이다.
어려운 연구과제도 스스로 맡아안고 로학자들을 위해 꾸려진 식당에 가는 시간마저 아까와 일하면서 식사를 하며 분초를 쪼개가는 그 불같은 헌신에 의해 《중세조선말사전》을 비롯한 가치있는 도서들이 나오게 되였다.
그는 50여년간 예술교육부문에서 일하면서 인민의 사랑을 받는 재능있는 성악가수들을 수많이 키워냄으로써 주체예술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름난 교육자이다.
그러나 그가 전투임무수행중 머리와 팔, 다리에 부상을 입은 영예군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나이가 들면서 전쟁때 입은 상처자리가 도져 자주 애를 먹군 하지만 적의 아성에 돌입하여
그가 리용하는 수첩에는 이런 글줄이 적혀져있다.
《요즘 몸이 불편하여 며칠동안 출근하지 못하였다.내가 없다고 하여 교수사업에 큰 지장이 생기는것은 아니지만 량심의 공백이야 어떻게 메꿀수 있겠는가.바위도 불타던 1211고지에서 부상을 입은 몸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던 그 열정이 식어진다고 생각하니 자책감을 금할수 없다.…》
자리를 박차고 결연히 집을 나서는 그를 보며 자식들이 만류했건만 로병의 결심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그가 살고있는 대동강구역 문흥2동에서부터 음악학원까지는 시내를 거의 가로질러가야 할만큼 많은 거리를 가야 한다.그 먼길을 채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가자니 내짚는 한걸음한걸음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하지만 자기가 걷는 그길이 전화의 나날처럼 당앞에 다졌던 맹세를 지키고 새세대들의 가슴속에 1950년대의 정신을 새겨주는 길이기에 그는 꿋꿋이 이어갔다.
그는 늘 교원들에게 우리는 학생들에게 재능을 가르쳐주기에 앞서 당과 조국을 먼저 아는 참된 충성심과 애국심을 배워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군 한다.그것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며 그는 학생들과 함께 매일 아침 만경대에서 정히 떠온 물로 학원주변에 모셔진
창도군종자관리소 소장 정재영동지도 어제날 조국수호의 전초선에 섰던 병사의 자세로 순간의 주춤도 없이 혁명보위의 최전방을 지켜가고있다.
당과 조국을 위하여! 진정 이 불같은 웨침은 포연탄우속을 헤치던 전화의 그날에만 울린것이 아니다.
1950년대 영웅전사들이 피흘려 조국의 존엄과 명예, 령토와 자주권을 지켜내고도 한생토록 변함없고 사심없이, 견실하고 대바르게 살며 후손들에게 애국적삶의 본보기를 가르쳐주는 그길에서 전화의 나날 신념으로 새겨안았던 충성과 애국의 메아리는 오늘도 힘차게 울리고있다.
전우들의 몫까지 합쳐
우리의 전쟁로병들이 행복할 때나 어려울 때나 제일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먼저 간 전우들일것이다.
조국의 운명을 지키는 수호의 길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귀중한 혁명동지들, 눈을 감는 순간에조차
나는 지금도 그들앞에 부끄럼없이 살고있는가, 한순간이라도 그들의 념원을 잊은적은 없었던가.
이런 량심의 물음앞에 자신을 세워보며 전우들의 당부를 지켜가고있는 사람들속에는 93살 고령에도 농사일에 진심을 바쳐가고있는 대성구역 안학동의 리재석동지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 제5차 전국로병대회에 참가하여
(함께 싸우던 전우들과 이 영광의 자리에 나란히 섰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의 추억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어느한 비행장방어전투에로 거슬러올라갔다.
갑자기 나타난 10여대의 적기가 하늘을 썰며 비행장에 접근하기 시작했다.그때 고사포병이였던 리재석동지와 그의 전우들은 즉시 적기를 조준경안에 넣고 복수의 명중탄을 안기였다.
한대, 두대… 적비행기들이 돌덩이처럼 떨어지는 통쾌한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들의 눈앞이 불시에 어두워졌다.적기가 떨군 폭탄이 그들의 포진지를 삼켜버렸던것이다.그러나 고사포는 쉼없이 불을 내뿜었다.이 치렬한 전투에서 많은 전우들이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그때 포장은 마지막숨을 몰아쉬며 리재석동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이렇듯 못잊을 전우들의 넋이 살아숨쉬는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를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을 보고 또 보며 그는 자기의 량심에 물었다.
나는 지금 전우들앞에 떳떳하다고 말할수 있는가.
이런 생각으로 새날을 맞은 그는 자식들에게 마을주변에 있는 평양시농촌경리위원회 대성남새농장 안학과수작업반에서 일할 의향을 내비쳤다.그의 심정을 모르는 자식들이 아니였지만 선뜻 응할수 없었다.한것은 집에서 마을끝에 있는 과수작업반까지는 걸어서 한참 가야 했던것이다.그길을 어떻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매일 오가며 일할수 있단 말인가.
자식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그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집을 아예 옮기자는거다.너희들이 내 심정을 리해해주기 바란다.》
이렇게 되여 리재석동지는 과수작업반근처에로 이사하게 되였고 이곳 작업반 4분조포전에는 그의 발자욱이 찍히게 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농장의 일군들과 근로자들이 그를 명예농장원으로 등록하겠다고 했지만 로병은 한사코 반대했다.
내가 농장원이 되면 농장에서 분배몫을 주려고 하지 않겠는가.나는 그 무슨 보수나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전우들의 부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것이다.
이렇듯 마음속에 전우들에 대한 생각만이 꽉 차있는 그였기에 농장원들보다 더 빨리 포전에 나오고 제일 늦게 퇴근하면서 한치한치의 땅에 애국의 땀을 아낌없이 묻었다.
그 나날에 태여난 《강냉이 40포기》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도 이곳 농장원들은 깊은 감동속에 떠올리군 한다.
올해 봄에 그들은 도로주변에 있는 땅을 개간하여 강냉이를 심는 작업을 진행하였다.뙤약볕이 내려쪼이는 속에서 온종일 일하느라 분조원들은 어지간히 지친 기색이였다.얼마쯤 지나 하루일을 끝낸 그들과 함께 퇴근길에 오르던 리재석동지는 작업장끝에 있는 돌각담을 보게 되였다.
(이 땅을 묵인다면 전우들이 얼마나 가슴아파하겠는가.)
다시 팔을 걷어붙인 리재석동지는 밤깊도록 돌들을 추어내고 삽질을 해가며 찾아낸 새땅에 정성다해 곡식을 심었다.
새로 일군 2평의 땅에 심은 강냉이 40포기, 그것은 비록 적은 량이였지만 여기에는 전우들의 몫까지 합쳐 하루를 두곱, 세곱으로 살려는 한 로병의 불같은 진정이 어려있었다.
하다면 우리의 전쟁로병들은 어찌하여 인생의 말년에도 불같은 전우애를 안고 자신을 깡그리 바쳐가고있는것인가.
김책공업종합대학에는 온 교정이 《우리 로병선생님》이라고 정담아 부르며 따르는 두명의 연구사가 있다.그들이 바로 재료과학기술학부 금속재료연구소의 강정백동지와 광업공학부 채굴공학연구소의 김은섭동지이다.
대학의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그들을 더없이 존경하는것은 다만 교수, 박사라는 학위학직이나 다심한 인정미, 고지식한 성품때문만이 아니다.
지난해 강정백동지는 뜻밖의 일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게 되였다.그로 하여 대학에 출근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가슴은 타드는것만 같았다.대학교정을 떠나 무슨 사는 보람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육신을 꽉 붙잡고있는 다리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는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만약 전우들이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의 눈앞에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단독으로 적들을 유인하던 분대장이며 피와 살도 서슴없이 바쳐 치료해주던 군의들의 모습이 련이어 떠올랐다.
그들의 희생적인 헌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나의 긍지높은 오늘이 있을수 있겠는가.내가 몸이 불편하다고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전우들에 대한 배신이다.
그때부터 강정백동지는 침상에서도 금속공업의 주체화실현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사업에 달라붙었다.
밤낮없이 책속에 묻혀있는 그를 보면서 대학일군들과 의사들이 거듭 만류했지만 그때마다 로병의 대답은 하나같았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것은 약이나 안정치료가 아니라 과학기술자료들이라고, 인생말년에도 전우들앞에 부끄럼없이 살수 있게 도와달라고.
이런 감동깊은 모습은 김은섭동지에게서도 찾아볼수 있다.
전쟁때 입은 상처로 먼길을 걷기 힘든 속에서도 수천척지하막장에 서슴없이 들어가고 고심어린 연구성과도 새세대 연구사들에게 넘겨주며 그는 나라의 석탄공업발전을 위해 지혜와 열정을 다 바치고있다.
이렇듯 우리의 로병들은 그 어떤 어려움속에서도 순간의 좌절이나 한치의 드팀도 없이 당의 요구, 조국의 부름앞에 언제나 앞장서려는 순결한 량심과 고결한 헌신으로 전우들의 넋을 꿋꿋이 이어가고있다.
진정 승리할 조국을 위하여, 후대들의 창창할 래일을 위하여 피와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전우들의 부탁을 지켜, 그들의 몫까지 합쳐 열배, 스무배로 일을 더 많이 하는것을 응당한 도리로, 본분으로 여기는 순결한 도덕의리심이야말로 전승세대라는 긍지높은 부름에 충실할수 있게 하는 무진한 삶의 원동력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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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의 축포가 오른 그날로부터 70여년세월이 이 땅에 흘렀지만 우리 전쟁로병들의 정신세계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다.
내 생명 다할 때까지 조국위한 성스러운 복무의 길을 굴함없이 이어가리라.
육체에는 로쇠가 있을수 있어도 마음만은 로쇠를 몰라야 한다는 억센 각오와 의지를 안고 인생의 시작도 마감도 한본새로 사는 충성스럽고 애국적인 인간들,
이런 영웅적인 세대가 전진하는 대오에 활력을 부어주며 우리앞에 서있기에
본사기자 김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