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13(2024)년 9월 9일 월요일  
로동신문
《영원히 기억하라!》
피맺힌 원한이 어린 하나의 수기를 펼치고

2024.8.3. 《로동신문》 6면


얼마전 만경대구역 장훈3동 38인민반에서 사는 김용화로인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미제의 야수적본성을 만천하에 고발하여달라고 하면서 가정에서 수십년동안 보관하고있었다는 보풀인 책 한권을 내놓았다.

《우리 아버지의 피맺힌 원한이 어려있는 수기입니다.근 100년전의 력사적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여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것은 수기의 주인공인 김명섭이 바로 미국선교사놈이 청강수로 《도적》이라고 이마에 새기였던 그 소년이라는 사실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제때 우리 나라에 기여든 미국선교사가 집뜨락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한알의 사과를 주었다고 하여 철없는 조선어린이의 이마에 청강수로 〈도적〉이라고 새겼던 악귀같은 만행은 지금도 우리 인민의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수기의 첫 페지에는 이렇게 씌여져있었다.

《시간은 아픔을 잊는 명약이라고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더욱 또렷해지는것이 바로 나의 피눈물나는 과거이다.

그것을 잊는다는것은 원쑤를 잊는것이나 같다.》

나라없던 그 세월 김명섭은 어린 나이에 기둥처럼 믿고 살던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지주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갖은 고역을 다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놈의 과수원곁에서 소꼴을 베고있다가 설익은 사과 한알을 주은것이 죄가 되여 그는 이마에 도적이라는 글을 새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에 대해 수기에는 이렇게 씌여져있었다.

《사과를 보는 순간 모진 고생속에 살아가는 어머니모습이 어려와 그것을 집어들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개짖는 소리와 함께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선놈의 새끼 사과를 훔쳤구나.〉

와뜰 놀라 돌아보니 미국선교사 페스머놈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개를 앞세우고 달려오고있었다.

잡아먹을듯이 날뛰는 미국놈에게 나는 바람에 떨어진것을 주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페스머놈은 내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고 사나운 개를 내몰았다.

삽시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미국선교사놈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명섭이를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다 못해 팔목을 잡고 끌고가더니 바줄로 사과나무에 꽁꽁 동여맸다.

그다음 집으로 들어가 가족들까지 데리고나온 페스머놈은 청강수와 칼을 들고 명섭이에게 다가왔다.

그때의 일을 김명섭로인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정신을 차린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애타게 찾았다.그러자 선교사놈은 나의 입을 틀어막고 칼로 이마와 왼쪽볼에 〈도적〉이라는 글을 새기고는 청강수를 부었다.

순간 뼈를 바스는것과도 같은 아픔에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미국놈은 무엇이 부족한지 여름철의 뙤약볕에 청강수를 말리였다.

그리고 또 청강수를 붓고 말리고…페스머놈은 한시간동안에 이런 악귀같은짓을 세번씩이나 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지르고도 페스머놈은 사과값을 물어야 한다고 하면서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고 고열에 시달리는 명섭에게 한주일동안 과수원의 김을 매라고 커다란 호미를 쥐여주는 파렴치한짓도 서슴지 않았다.

수기의 갈피에서 한장의 사진이 나졌다.김명섭이 전후에 찍었다는 독사진이였다.

사람의 탈을 쓴 미국놈들의 죄행을 고발하는듯 수십년이 지난 그때에도 명섭의 이마에는 원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진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느라니 길가에 나설 때면 늘 이마를 가리우고 다녔다는 이야기며 피눈물나는 지난날이 떠올라 한생토록 사과를 입에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가슴아프게 돌이켜졌다.

김명섭은 수기에 이렇게 썼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은 미국놈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더욱 열렬하게 해주었다.나는 우리의 행복을 빼앗으려는 미제원쑤들에게 죽음을 안기는 심정으로 전선에 더 많은 탄약을 보내주기 위해 땀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쳤다.》

전쟁은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우리 공화국을 집어삼키려는 미제의 책동은 계속되였으며 더욱 악랄해졌다.

하여 그는 수십년동안 그 누구에게도 터놓지 않았던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원쑤 미제의 야수적본성을 고발하게 되였다.

그의 심정을 헤아려 당에서는 김명섭을 신천박물관 강사로 일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었다.

이렇게 신천박물관 강사가 된 김명섭은 수많은 참관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그는 불치의 병을 앓는 속에서도 인민군부대들을 순회하면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급교양강의를 멈추지 않았다.

수기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다.

《나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의학은 나에게 고칠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리였다.

기껏해서 한두해.

하지만 그 여생을 결코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받아주며 편안히 살수 없다.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땅에 다시는 나의 운명이 되풀이되는 사람이 없게 적은 힘이나마 다 바쳐야 한다.

나는 이미 수십년전 미국놈에 의하여 죽음과 같은 삶을 선고받지 않았는가.》

그것을 보는 우리의 눈앞에는 추운 겨울에도, 비오는 날에도 산발을 타고넘으며 인민군부대들을 찾고 또 찾은 그의 모습이 안겨오는것만 같았다.

수기는 끝났지만 그가 한생토록 가슴속에 안고 산 복수의 맹세는 그의 가정에 늘어나는 조선인민군입대증과 더불어 계속 울리고있다.

백수십년전부터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미제, 불구대천의 원쑤들에게서 천백배의 피값을 받아내려는 우리 인민의 의지가 그 입대증들에 어려있다.

수기를 덮는 우리의 눈가에 그가 수기의 마감에 또박또박 박아쓴 글발이 안겨왔다.

《아파도 영원히 기억하라, 대를 이어 기어이 복수하라!》

본사기자 김현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