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1일 월요일  
로동신문
은혜로운 사랑의 품속에서 60여년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히 이름지어주신 김귀국동로인의 생활에서

2024.9.6. 《로동신문》 2면



함흥시 성천강구역 상신흥동 116인민반에는 수십년전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히 이름지어주신 김귀국동로인이 살고있다.첫 고고성을 울린 때로부터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인생은 진정한 어머니조국의 품, 당의 품만이 우리 인민에게 인간의 참된 존엄과 보람차고 행복한 삶을 안겨주고 빛내여주는 가장 은혜로운 사랑의 품이라는것을 가슴뜨겁게 말해주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은 인민들에게 참된 삶과 행복을 안겨주는 진정한 조국입니다.》

주체48(1959)년 12월 일본의 어느한 항을 떠난 한척의 배가 청진항으로 향하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속에 마련된 두번째 귀국선이였다.오매에도 그립던 조국으로 향하는 귀국동포들에게 기쁨을 더해주는 또 하나의 희소식이 전해졌다.한 녀성이 귀국하는 도중에 떡돌같은 아들을 낳았던것이다.

산모와 아기는 의료일군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조국에 도착한 다음 그들은 또다시 평양의 어느한 병원으로 후송되였다.저주로운 일본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여서 귀국동포들은 사회주의조국의 혜택을 처음으로 받아안은 복동이를 부러움의 눈길로 바래워주었다.

그때로부터 며칠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2차로 귀국한 동포들을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그들에게 항행시간이 얼마나 걸렸는가, 이번에 몇사람이나 왔는가, 앓는 사람은 없었는가를 하나하나 물으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한 녀성이 귀국하는 도중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였다.

순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그러니 오는 도중에 귀국동포 한사람이 더 늘어난셈이라고, 우리 나라에 운이 텄다고 하시며 못내 기뻐하시였다.이윽하여 그이께서는 어린애의 이름을 아직 짓지 않았다는것을 아시고는 여기에서 이름을 짓자고 하시면서 몸소 《귀국동》이라고 지어주시였다.

이렇게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어버이수령님의 사랑넘친 축복을 받으며 은혜로운 사회주의조국의 품에서 첫걸음마를 뗀 그는 이름그대로 귀국동, 행복동이가 되여 무럭무럭 자라났다.

당의 은정속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희망대로 교원이 되였다.그의 곁에서는 언제나 생활의 구석구석을 속속들이 헤아려 보살펴주는 고마운 손길이 떠날줄 몰랐다.

나라에서는 그가 가정을 이루게 되였을 때에는 번듯한 새 살림집도 안겨주었다.그것은 그와 그의 가정이 조국에서 세번째로 받은 집이였다.

고마운 조국의 품속에서 그는 그후 당일군으로 어엿하게 성장하였다.

귀국동, 행복동에게 베풀어지는 당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마흔번째 생일을 맞이할 때에는 은정어린 생일상과 선물을 보내주시였다.

이뿐이 아니다.그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모시고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사랑의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도 지니였다.

사회주의조국의 품이 아니였다면 그가 어떻게 이렇듯 긍지높고 행복한 삶을 누릴수 있었겠는가.

사회주의는 우리의 생명이고 생활이다.그것을 실체험을 통하여 절감한 그였기에 자식들을 조국보위초소에 내세웠고 한생을 맡은 초소에서 성실히 일하였다.

년로보장을 받은 후에도 그는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저 자식들의 일손을 성심성의로 돕고있다.

그는 지금도 자주 자기의 인생담을 자손들에게 들려주면서 이렇게 당부하군 한다.

《내 인생이 그러했듯이 사회주의조국의 품속에서 너희들도 보람차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것이다.이 고마운 제도를 목숨처럼 귀중히 여겨야 한다.》

은혜로운 사랑의 품속에서 행복으로 충만된 인생길을 걸어온 김귀국동로인, 그의 생활은 우리 인민모두의 삶이 뿌리내린 우리의 사회주의제도가 얼마나 고마운 품인가 하는것을 다시금 깊이 새겨주고있다.

글 및 사진 지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