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6일 토요일  
로동신문
그가 받은 명의사칭호

2024.9.29. 《로동신문》 4면


지난해 11월 보건성에서는 우리 나라 피부과학분과의 권위있는 의료일군들이 참가한 가운데 명의사등록심의가 진행되였다.심의대상은 난치성피부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할수 있는 연구성과를 이룩한 황해남도종합병원 피부과 과장 김영희동무였다.

우리 나라에는 환자치료사업에서 의의있는 성과를 이룩한 의료일군들을 명의사로 등록하는 제도가 있다.

그 영예를 바로 김영희동무가 지니게 된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의료일군은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는 인간생명의 기사입니다.》

김영희동무는 황해남도종합병원 과장으로 일해온 지난 10년간 무려 200여명의 난치성피부병환자들을 치료하여 좋은 성과를 이룩하였다.하기에 여러가지 난치성피부병을 막힘없이 치료하군 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누구나 명의사라고 불렀다.

《솔직히 론문도 쓰고싶었고 학위도 지니고싶었습니다.하지만 인민들의 진정이 담긴 명의사란 부름이 더 소중했습니다.》

소박하나 의미깊은 말이였다.

건강하여 오래오래 살고싶은것은 사람들모두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간혹 병에 걸린다 해도 척척 고쳐낼수 있는 명의사가 있다는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또 그로 하여 의료일군들이 인간생명의 기사로서 뭇사람들의 존경속에 산다는것은 얼마나 긍지스럽고 영예로운 일인가.

김영희동무에게는 지난 10년간 난치성피부병치료와 함께 걸어온 헌신의 자욱이 속속들이 새겨져있는 한권의 일지가 있다.

《2015년 4월 13일

지금 우리 과에서는 함흥시에서 온 유치원교양원이 입원치료를 받고있다.그 처녀는 고치기 매우 힘든 피부병을 앓고있다.

과성원모두가 떨쳐나 한달동안 집중치료를 하였는데 환자상태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다.과연 고칠수 있을가?》

당시 처녀교양원에 대한 치료는 날이 갈수록 김영희동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낮에 밤을 이어 참고서적들을 탐독하며 치료방법을 연구하던 어느날 아침 그는 환자의 머리맡에서 한장의 사진을 보게 되였다.

처녀교양원이 유치원아이들속에서 밝게 웃는 행복넘친 모습이 담긴 사진이였다.…

김영희동무는 하루종일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사진과는 달리 얼굴에 늘 그늘이 져있는 처녀와 정다운 선생님을 기다리고있을 꼬마들이 자꾸만 눈앞에 얼른거렸던것이다.

그로부터 며칠후 처녀교양원과 꼭같은 병을 앓고있는 환자가 그를 찾아왔다.옹진군의 한 광부의 아들이였는데 중학교졸업을 앞둔 그는 김영희동무를 만나자바람으로 《선생님, 제가 병을 고치고 군대에 나갈수 있게 꼭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날 김영희동무는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진 의사로서의 본분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우리 나라에서 난치성질병을 완전히 없애는것은 시대가 우리 보건일군들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임무이다.그런데 의사인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가.어렵고 힘들다고 하여 난치성피부병에 대한 연구과제를 외면하고있지 않는가.)

이런 생각으로 한밤을 지새운 그는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달라붙었다.낮시간이면 환자치료에 전념하다가도 퇴근시간이 되면 그의 걸음은 집이 아니라 의사실로 향해졌다.

자정이 넘도록 새로운 치료방법을 연구하였고 그것을 림상실천에 도입하기 위해 무척 애썼다.어쩌다 집에 들어가서도 시약들을 차려놓고 연구사업에 몰두하였다.

한가정의 안일과 행복에 앞서 의료일군으로서의 사명과 본분에 더없이 충실하려는 안해의 정신세계에 이끌려 군관인 그의 남편도 김영희동무의 일손을 적극 도와주었다.

고심참담한 탐구와 사색, 헌신의 낮과 밤이 흐르는 속에 얼마후 함흥시의 유치원교양원과 옹진군의 광부의 아들은 병을 털고일어나 밝은 웃음을 지으며 병원문을 나섰다.…

일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2022년 12월 3일

오늘 나는 배천군에 살고있는 순복할머니네 집을 찾았다.오래전에 병원에서 퇴원한 그의 몸상태가 어떤지 알아보고싶어서였다.할머니는 〈명의사의 지극한 손길이 닿은 내 몸이 어련할라구.〉라고 하며 그렇게도 고통스럽던 병이 이제는 더 재발하지 않는다고 기쁨에 겨워 말하는것이였다.건강한 몸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그를 보느라니 순복할머니를 처음 만나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당시 환자는 병명을 딱히 알수 없는 피부병때문에 발편잠을 못 자고있었다.어느날 중한 상태에서 병원에 실려들어온 환자의 딸이 어머니를 순간이라도 편히 쉴수 있게 하는 약은 없는가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을 때 김영희동무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중앙병원들과 협의회도 진행하고 치료경험을 살려 새로운 치료방법도 터득하였으며 마침내 환자의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치료에 진입하였다.그 나날 그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 약재를 구하러 수백리 밤길도 주저없이 떠났고 때로 환자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곁에서 온몸을 주무르며 안마치료도 해주었다.친딸된 심정으로 세면도 시켜주고 밥술도 떠주면서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그는 진정 의사이기 전에 환자의 친혈육이였다.

그 정성속에 드디여 병을 완치하고 퇴원하던 날 환자는 입원실에 써붙인 《정성》이라는 두 글자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이런 훌륭한 명의사를 키워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 고마움의 인사를 삼가 드리고싶다고 뜨거움에 젖어 말하였다.

김영희동무에게서 치료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 명의사칭호를 받았다는것을 알지 못하고있다.하지만 그를 누구나 명의사로 부르며 존경하고있다.

그가 받은 명의사칭호, 정녕 그것은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존재로 떠받들고 보살펴주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의 참모습에 대한 뚜렷한 실례인 동시에 인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성실한 의료일군들에게 안겨주는 조국의 값높은 표창인것이다.

본사기자 오은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