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4. 《로동신문》 5면
《삶의 긍지와 보람은 결코 자기만 잘 먹고 잘 입고 향락을 누리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조국과 인민, 사회와 집단을 위하여 몸바쳐 싸우는 창조와 투쟁속에 있습니다.》
얼마전
비록 나이와 직업, 해놓은 일은 서로 다르지만 이들의 아름다운 소행이 우리모두에게 주는 여운은 자못 크다.
어떤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인가.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들의 고결한 인생관에 그대로 비껴있다.
어떤 사람이 돋보이는가
누구나 아름다운 생의 자욱을 남기기를 소원한다.
허나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다.
어떤 인생관을 지니고있는가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속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인생과 오랜 세월 동지들과 집단의 추억속에 살아있는 값높은 삶이 판이하게 갈라지는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주의애국공로자인 중구주택건설사업소 로동자 김영애동무의 모습에서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몇해전 그가 건설자들과 함께 무궤도전차에 올랐을 때였다.
그런데 작업과제를 넘쳐 수행하느라 늦게야 퇴근길에 오른 그들의 땀젖은 모습을 바라보던 한 로인이 송신, 송화지구 살림집건설자들이 아닌가고 묻는것이였다.
그리고나서 야간지원돌격대에 나가는 자기 손자에게서 들으니 건설자들은 낮과 밤이 따로없이 일하고있다는데 정말 감동된다고 하면서 잠시라도 다리쉼을 하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손님들이 그들에게 저마다 자기 자리를 양보했다.
그런 모습을 보게 되니 김영애동무의 눈가에는 문득 어린시절 보아오던 어머니의 모습이 안겨왔다.
중학교교원이였던 어머니는 후대교육사업과 가정일때문에 늘 바삐 지내면서도 많은 집짐승을 길러 인민군군인들에게 보내주군 하였다.
그러느라 언제한번 손이 마를새 없었지만 하고싶어서 하는 일인데 무엇이 힘들게 있겠는가고 하며 오랜 세월 변함없이 원군길을 걷는 어머니를 제자들도 자식들도 무척 존경하였다.
그렇게 생각을 가지쳐갈수록 그에게는 함께 일하는 건설자들의 모습이 무척 돋보였다.
하여 그때부터 그는 하루일이 끝난 저녁무렵이면 나는 오늘 집단과 동지들을 위해 무엇을 바쳤는가라는 량심의 물음앞에 자신을 세워보면서 일터에서 순직한 종업원의 어린 자식을 여러해동안 혈육의 정을 안고 따뜻이 보살펴주었으며 앓는 사람이 있으면 성의껏 마련한 보약재들도 안겨주고 제대군인합숙생들의 생일날이면 정성다해 만든 별식으로 상을 차려주기도 하며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왔다.
남보다 생활이 별로 풍족하지 못한 그가 그렇게 한다는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에게도 돌봐야 할 가정이 있고 식솔들이 있다.
하지만 나라와 인민을 위해 자신을 바쳐가는 건설자들의 모습을 제일 훌륭한 모습으로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한 그는 사회와 집단을 위한 길을 그처럼 묵묵히 걸어올수 있었다.
그렇듯 조국과 인민을 위한 헌신의 삶을 가장 아름다운것으로 간주하고 자신도 그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돋보인다.
덕을 입었으면 보답할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이런 자료가 있다.
지난 10여년간 인민군대원호와 영예군인, 영웅가족을 성심성의로 도와주고 중학교시절 선생님의 친딸이 되여 함께 살면서 중요대상건설장들을 성심성의껏 지원…
함경남도출하도매소 로동자 김철옥동무가 스스로 찾아한 그 많은 일들을 두고 사람들이 정말 쉽지 않은 녀성이라고 칭찬할 때마다 그는 나라의 은덕을 입고 사는 공민으로서 응당 할 일을 했을뿐이라고 수집게 말하군 한다.
그가 그처럼 사회와 집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찾아하면서도 그 모든것을 응당하게 여기고있는데는 사연이 있다.
10여년전 어느날 그는 길에서 안해가 미는 사륜차에 앉아가는 영예군인을 보게 되였다.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군사임무수행중 뜻밖에 부상을 당한 영예군인이며 작가라는것을 알게 된 그는 불편한 몸으로 꼭 시를 창작해야 하는가고 물었다.
그런 그에게 영예군인은 물론 가만히 앉아서 나라의 혜택을 받는다고 탓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량심이 허락치 않는다고 웃으며 말하는것이였다.
김철옥동무는 귀중한 청춘시절을 조국위해 바치고도 못다 바친것이 있는듯 스스로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찾아하는 그의 고상한 정신세계에 머리가 숙어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에 비해볼 때 자신은 어떠했던가.고마운 어머니조국의 품속에서 태여나 자란 이 나라 공민의 한사람으로서 지금까지 받아안은 나라의 크나큰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과연 얼마나 애써왔던가 하는 생각에 죄책감을 금할수 없었다.
그럴수록 언제인가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던 자기를 구원해준 한 군인의 모습도 새삼스레 안겨왔다.
(나라덕, 군대덕을 그만큼 입고 살아온 내가 지금껏 한 일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일손을 잡으니 맡은 일을 잘하는것으로는 도저히 만족할수 없었다.그리하여 사회와 집단을 위한 좋은 일들을 스스로 찾아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당에서는 공민으로서 너무도 응당한 보답의 길을 걷고있는 그를 지난해 건군절경축행사에 특별대표로 불러주는 대해같은 은덕을 베풀어주었다.
하기에 그는 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군 한다.나라의 덕을 입고 그만큼 살아왔으면 응당 보답할줄 아는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는가고.
그처럼 아름다운 인생관을 지니고 그는 오늘도 날이 갈수록 하늘같은 믿음과 사랑만을 거듭 안겨주는 당과 국가의 은덕에 한생을 깡그리 바쳐 보답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고있다.
자식의 눈동자에 새겨주는 모습
함경남도체신관리국 로동자 진순영동무의 나이는 올해 40살이다.14살 난 딸자식과 함께 살고있는 그는 지난해에 맡은 일을 잘한것으로 하여 모범로동자영예상을 수여받았으며 올해에는 동지들과 집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지닐수 없는 고귀한 영예를 거듭 받아안은 그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군 한다.어떻게 되여 그렇듯 크나큰 인생의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는가고.
그때마다 그는 자식에게 훌륭한 어머니가 되고싶었을뿐이라고 이야기하군 한다.그렇듯 그는 자식들이 어머니의 자욱자욱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것을 늘 가슴에 새겨안고 살며 일했기에 지난 시기 집단과 동지들을 위해 남모르는 땀방울을 수없이 흘려왔다.
동지들에게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주기 위해 수백리가 넘는 밤길을 걸어 새끼돼지와 종자닭을 구해오기도 했고 자기 단위의 종업원이였던 한 영예군인의 생활을 오래동안 친혈육의 심정으로 돌봐주기도 했다.언제인가는 함께 일하는 종업원의 자식이 결혼식을 한다는것을 알고 살림살이에 필요한것들을 품들여 마련해준적도 있었다.
늘 남을 위해 사랑과 정을 기울이다나니 그에게는 언제한번 자기 자식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줄새가 없었다.
딸의 생일날에도 종업원들의 식생활향상을 위해 집짐승우리에 붙어있기가 일쑤였고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는 날에조차 사료를 구하기 위해 먼 출장길을 떠난적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년전 최대비상방역기간에도 그는 나어린 딸자식을 년로한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맡은 임무에 헌신하였다.아름다운 인간미를 지닌 어머니의 모습을 눈동자에 새기며 자라서인지 그의 딸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남보다 공부도 잘하고 동무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헤아리고 선뜻 도와주는 모범학생으로 자랐다.
그렇다.우리 어머니들에게는 향유가 아니라 헌신의 자욱을 새겨가는데 인생의 진정한 보람과 긍지가 있음을 자신의 실천적모범으로 자식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줌으로써 내 조국의 애국의 대를 더욱 꿋꿋이 이어가는데 이바지해야 할 무거운 혁명임무가 지워져있다.
당과 혁명이 부여한 그 성스러운 과업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하자면 진순영동무처럼 집단과 동지들을 위해 자신을 사심없이, 깡그리 바쳐야 한다.바로 그길에 이 나라 어머니들의 참다운 행복이 있다.
애국의 길에 때늦음이란 없다
예순이 되는 나이에 사회주의애국공로자의 영예를 지니고 시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하는 청진시 수남구역량곡판매소 인수원 김은희동무에게 사람들은 때없이 이렇게 묻군 한다.그 나이에 나라를 위해 불같이 사는 그런 열정이 과연 어디에서 생기는가고.
그때마다 그는 사람들에게 애국의 길에 어찌 나이가 대수이겠는가고 말하군 한다.
사실 10여년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기 가정만을 위해 살던 녀성이였다.그러던 그가 사회와 집단을 위한 애국의 길에 나서게 된데는 사연이 있다.
남편의 뒤바라지나 잘하고 자식이나 잘 키워 내세우면 녀성으로서, 안해로서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고만 생각하던 그는 남편이 뜻밖에 세상을 떠나간 후 함께 일하던 동지들이 오랜 세월 남편을 잊지 못해하는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되였다.
비록 심장의 고동은 멈추었지만 사회와 집단의 추억속에 남아있는 생처럼 아름다운 삶이 어디에 또 있으랴 하는 생각이 때없이 가슴을 칠수록 그에게는 남편처럼 한생을 깡그리 나라위한 길에 바쳐갈 결심이 나날이 굳어졌다.
하여 그는 쉰고개를 가까이하고있던무렵에 돌연 사회생활에 뛰여들었다.젊은이들처럼 힘과 지식으로 나라를 떠받들지는 못해도 능력껏, 힘자라는껏 무엇인가 나라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는 맡은 일을 직심스레 하는 한편 당시 온 도가 중시하던 어랑천발전소건설장을 찾아 애국의 첫 자욱을 내짚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그뿐이 아니다.맡은 일로 바쁜 속에서도 그는 구역안의 특류영예군인들과 부모를 잃은 제대군인들의 생활을 친혈육의 심정으로 돌봐주었으며 시안의 원료기지에 중등학원졸업생들이 탄원하였을 때에도 그들을 찾아 한밤중에 수십리길을 달려가기도 하였다.그렇게 그의 애국의 발자취가 새겨진 곳을 일일이 다 꼽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그렇듯 남보다 애국의 땀을 더 많이 흘려야 한다고 늘 자신의 마음에 채찍질하며 불같이 살아오는 그를 당과 국가에서는 시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누구나 본받아야 할 사회주의애국공로자로 내세워주었다.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오늘도 시안의 일군들과 근로자들의 사랑과 존경속에 보람찬 삶을 누려가는 그의 모습은 애국의 길에 때늦음이란 없다는 소중한 진리를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깊이 새겨주고있다.
그렇다.비록 늦게 떠난 걸음이라 할지라도 가슴속에 나라위한 고결한 애국의 마음만 깊이 간직한다면 많은 일을 할수 있다는것을 바로 김은희동무가 걸어온 길지 않은 애국의 길이 보여주고있다.
우리는 사회주의대가정의 한식솔
해주어구공장 로동자 황정옥동무가 리용하는 수첩의 첫 페지에는 사회와 집단, 동지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다 바치면서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공산주의미풍이 높이 발휘되게 하여 집단의 화목을 도모하고 참다운 동지적단결을 이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신
그렇듯 그는 조선직업총동맹 제8차대회에 참가하여 받아안은
지금으로부터 몇년전 공장에는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대중의 말밥에 오르던 한 로동자가 있었다.사람들은 그에게 곁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본인도 집단에 정을 붙이지 못한채 외롭게 지내고있었다.그런 그의 일을 두고 제일처럼 가슴아파한 사람은 다름아닌 황정옥동무였다.
언제인가 그 로동자가 신병이 도져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였다.그때 그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같은 호실에 있는 환자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자기에게는 과연 누가 찾아올것인가 하는 생각에 창피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잘못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후회도 갈마들었던것이다.
그런데 며칠후 황정옥동무를 비롯한 공장사람들이 호실문을 열고 들어서는것이 아닌가.공장에 갑자기 긴급생산과제가 제기되여 빨리 찾아오지 못한 자기들을 리해해달라고 하면서 병상태에 대하여서도 세심히 알아보고 치료에 좋은 보약재와 건강식품들도 안겨주는 황정옥동무를 보면서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귀중한것은 집단과 동지들의 사랑이라는것을 깨닫고 새 출발을 할 결심을 다지게 되였다.그럴수록 황정옥동무는 그의 사업과 생활에 더 깊은 관심을 돌리며 자그마한 소행도 공장속보판에 적극 소개하도록 하고 지난해에는 평양견학의 길로 떠밀어주면서 그의 열의를 부쩍 북돋아주어 오늘은 그가 공장이 자랑하는 혁신자대오에 당당히 들어서게 하였다.
이처럼 이 땅에는 남의 일이란 없다는 고결한 일념을 안고 사는 황정옥동무이기에 오래전부터 한 로병을 친할머니처럼 돌봐주면서 로병이 앓을 때에는 자기의 피도 서슴없이 뽑아 넣어준것을 비롯하여 사회와 집단을 위해 끝없이 헌신하고있는것이다.
그렇듯 서로 돕고 이끌며, 함께 울고웃으며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고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나가는 그의 뜨거운 마음이야말로 집단의 단합을 이룩하고 사회주의대가정의 향기를 더욱 짙게 해주는 사랑과 정의 밑뿌리였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