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6일 목요일  
로동신문
사회주의생활의 향기

2024.10.27. 《로동신문》 6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이 땅에 펼쳐지고있는 인민중시, 인민존중, 인민사랑의 화폭들은 인민대중제일주의가 구현된 우리식 사회주의의 참모습입니다.》

인민의 리익과 편의를 최우선, 절대시하고 사회의 모든 재부를 인민의 복리증진에 돌리고있는 고마운 사회주의제도의 시책으로 누구나 복된 삶을 누려가고 사람들모두가 한식솔, 친형제가 되여 따뜻한 정을 나누는 우리 사회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날마다 끝없이 꽃펴나고있다.

 

농장에서 진행된 축하모임

 

얼마전 안주시 솔숲농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가운데 축하모임이 진행되였다.

농장의 10여명의 농장원들이 숙천농업대학 원격교육학부 입학통지서를 받고 대학생이 된것이였다.

나이도 경력도 서로 다른 이들이였지만 농촌진흥의 새시대에 모르고서는 농사일에서도 앞장에 설수 없고 나서자란 고향땅을 더욱 살기 좋은 락원으로 전변시킬수 없다는 자각을 안고 하나와 같이 열심히 노력하였기에 오늘은 이렇게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였던것이다.

꽃다발을 가슴벌게 받아안은 농장원들이며 제도가 좋으니 평범한 농장원들도 대학생이 되였다고 축하의 인사를 보내는 사람들로 하여 온 농장이 명절처럼 흥성이였다.

축하모임에서 한 로인은 자식이 받은 대학입학통지서를 벌써 몇번이고 쓸어보며 대대로 내려오던 농사군의 가정에 어엿한 대학생이 나왔다고 눈굽을 적시였고 한 젊은 농장원은 농업과학기술보급실의 열성독자가 되여 자기도 꼭 대학생이 되겠다고 토로하였다.

농장에서 진행된 축하모임, 이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도 누구나 마음껏 배우며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펼수 있는 모든 조건과 환경을 마련해주는 우리 사회주의제도의 고마움과 귀중함을 다시금 절감할수 있다.

 

영웅가정의 사진첩

 

며칠전 사진첩을 한장한장 번져가던 함흥시 동흥산구역 신상동에서 사는 정춘옥녀성의 얼굴에는 미소가 비꼈다.

사진첩에는 그의 가정과 혈육의 정을 맺은 정다운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져있었다.

그들은 10여년전 정춘옥녀성의 아들이 군사임무수행중 영웅적위훈을 세우고 장렬하게 희생된 후부터 그의 가정을 찾아와 친혈육의 정을 기울이던 일군들과 근로자들이였다.

얼마전 그의 남편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고마운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과 정이 있어 그는 전혀 외로움을 몰랐다.

이윽하여 사진첩을 계속 번지던 그는 올해 전승절에 한 녀성과 찍은 사진에서 눈길을 뗄수 없었다.

전승절을 며칠 앞두고 그는 심한 병으로 앓아눕게 되였다.그때 같은 구역의 구흥동에서 살고있는 황옥화녀성이 찾아와 며칠간이나 곁에서 간호해주었다.지난 시기 사회와 집단을 위한 좋은 일을 많이 찾아한 황옥화녀성은 한구역에 공화국영웅의 어머니가 살고있다는것을 알고는 퇴근후면 자연히 그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군 하였다.

그는 공화국영웅의 어머니는 응당 우리 녀성들이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하면서 늘 찾아와 가정에 웃음꽃을 피워주고 생활상애로가 있을세라 돌보아주었으며 전승절아침에 뜻깊은 사진도 남겼다.

이런 무수한 사연들이 담겨진 사진첩을 펼칠수록 정춘옥녀성은 사람들모두가 한가정, 한식솔이 된 사회주의제도에서 사는 긍지를 한껏 느끼였다.

 

병원을 다시 찾은 사연

 

지난 9월 개성에서 평양으로 올라와 최경태내분비연구소로 향하는 전금란동무의 생각은 깊어졌다.

몇년전 그는 뜻밖의 병으로 연구소에 입원하게 되였다.당시 상태가 위급하여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맥을 놓고있었다.하지만 의료일군들은 그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여러 차례의 의사협의회가 진행되고 낮과 밤이 따로없이 치료가 벌어지는 속에 그의 병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여갔다.그후에도 의료일군들의 정성은 더욱 뜨거워졌다.그들은 매일과 같이 침대곁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치료에 성의를 다하였고 많은 보약재들과 영양식품들도 안겨주었다.

그가 퇴원한 후에도 의료일군들은 수시로 전화를 걸어 그의 상태를 알아보고 필요한 약들도 보내주군 하였다.

그런데 며칠전 뜻밖에도 외과연구실 실장 로재학동무가 전금란동무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동안 상태가 어떠한가, 이상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는가를 구체적으로 물어보고나서 평양에 올라와 다시 검진을 받으라고 하는것이였다.

의료일군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퇴원후 나날이 좋아지는 건강상태로 하여 본인도 이제는 병에 대하여 감감 잊고있었는데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라고 알려왔으니 이런 사실을 사회주의 우리 제도가 아닌 그 어디에서 또 찾아볼수 있으랴.

병원을 다시 찾은 사연,

여기에도 인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제일 귀중히 여기는 사회주의제도의 참다운 우월성이 그대로 비껴있는것이다.

 

돌격대원이 간직한 고향소식

 

자강도피해복구공사장으로 탄원하여온 평양시당원련대 대동강구역대대 대원 박호범동무는 얼마전 어머니가 보낸 통보문을 받게 되였다.

《어제 너의 사업소 사람들이 또 찾아왔댔다.그날도 인민반사람들이 나에게 자식들이 많아 정말 좋겠다며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통보문을 이윽토록 들여다보는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맺혔다.

대동강구역화초사업소 로동자 박호범동무가 자강도피해복구공사장으로 탄원할 당시 그의 마음속에는 걱정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다.안해는 사업상용무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어머니도 오랜 병환으로 하여 운신하기 힘든 몸이였던것이다.그러나 어머니는 당이 부르는 피해복구전역으로 주저없이 아들을 떠나보냈다.

이런것으로 하여 박호범동무는 집걱정으로 마음을 놓지 못했다.하지만 그것은 공연한것이였다.그가 자강도로 떠나간 때로부터 사업소의 일군들은 그의 집을 수시로 찾아와 따뜻한 정을 기울였다.땔감이 떨어질세라, 부식물이 부족할세라 마음을 쓰며 세심한 정을 기울였고 어머니의 몸이 불편하다는것을 알고는 병치료에 필요한 약재도 구해오고 곁에서 한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고향소식이 담겨진 통보문을 이윽토록 바라보는 그의 눈굽은 젖어들었다.

돌격대원이 간직한 고향소식에는 누구나 서로 돕고 이끌면서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우리 사회의 참모습이 어려있었다.

본사기자 안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