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6. 《로동신문》 6면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나는 무엇을 바쳤는가라는 물음에 늘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애국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선택을 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지난 3월 함흥시 성천강구역병원 의사 김영철은 그에 대하여 생각하며 치료실문을 열었다.자기의 땀과 열정이 스민 치료기재들을 안고 이곳으로 배치되여오던 때가 벌써 두해전이였다.
의학연구원의 어느한 연구소에서 사업하던 그가 구역병원의사로 임명받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였다.가족들도 구역병원의 의사가 된 그를 두고 실망해하였다.
하지만 영철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역급단위에서도 얼마든지 난치성질병을 치료할수 있다는 포부를 안고 이길을 택하였다.그러나 그 실천에는 의지가 필요했다.남다른 선택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책상우에 놓여있는 병력서를 보니 어제 저녁 과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흥심2동에서 사는 박산옥로인의 병이 호전되지 못하는 문제를 놓고 과에서는 전문병원으로 파송하는것이 어떤가 하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로인이 오랜 당뇨병을 가지고있다보니 대퇴골두무균성괴사치료에서 이렇다할 성과가 없는것은 사실이였다.그럴수록 우리 구역병원에도 난치성질병을 치료하는 유능한 의사가 있다고 하기에 찾아왔다고 하던 로인의 말이 귀가에 그냥 울려왔다.
김영철이 난치성질병치료연구에 온 정력을 쏟게 된것은 의사생활을 갓 시작해서부터였다.
어느날 허리아픔으로 하여 검사실을 찾았던 그는 뜻밖에도 자신이 척추질병에 걸렸다는것을 알게 되였다.좀 있으면 하반신마비가 올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정말 눈앞이 캄캄하였다.
마치 자기의 희망이 어디론가 훌 사라져버린듯싶었다.
이러한 때 그는 척추질병치료에 특기기술을 가진 한 의사를 알게 되였다.
당시 일부 병원들에서 하는 척추수술과는 달리 환자의 아픔을 줄이고 치료기일을 앞당기는 그의 치료방법은 대번에 영철의 마음을 끌었다.
그 의사의 도움으로 병을 고친 영철은 자기의 치료연구방향을 척추질병으로 돌리였다.
일단 연구에 들어서면 새날이 어떻게 밝는지도 모르고 직심스럽게 파고드는 그의 열정은 변형성척추질병치료연구에서 많은 전진을 가져왔다.
영철은 이 과정에 다리아픔을 일으키는 질병들의 호상련관성에 대해서 파고들게 되였으며 대퇴골두무균성괴사에 대한 치료방법탐구에도 도전하였다.
몇해후 그의 연구성과를 림상실천에 도입하는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 영철은 구역병원의사로 갈것을 희망하였다.
《영철선생, 일시적인 흥분으로 이길을 택한것은 아닙니까?》
세계적으로도 난치성질병의 하나로 인정되고있는 대퇴골두무균성괴사를 비롯하여 많은 난문제가 있는 여러 질병을 구역병원에서 치료해보겠다는 그의 결심에 연구소일군도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허나 당에서 말단단위의 의료봉사수준을 높일데 대한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강조하고있다는것과 난치성질병들을 조기에 발견하자면 주민들을 직접 대상하고있는 구역병원으로 꼭 가야 한다는 영철의 결심을 듣고는 적극 지지하였다.
구역병원의 책임일군도 실력있는 의료일군이 배치된데 대하여 누구보다 기뻐하였다.
《병을 조기에 적발하는데서 우리 구역병원의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그런 의미에서 볼 때 조기대퇴골두무균성괴사의 치료방법에 대하여 연구하고있는 영철선생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당조직의 믿음을 받아안은 영철은 무서운 정열가가 되여 자기식의 치료방법들을 하나하나 정립하여나갔다.
자체로 치료기재들을 제작한데 맞게 매 사람의 체질에 따르는 치료전술을 세워가며 치료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였다.치료하는 짬시간에도 책을 보며 항상 사색하고 탐구하는 그를 두고 어디서 저런 열정가가 왔는가고 사람들모두가 혀를 찼다.
애쓴 보람은 컸다.구역병원에 여러 척추질병에 대한 진단을 척척 내리고 치료도 하는 의료일군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왔다.
어느날 함흥시에 사는 한 주민이 그를 찾아왔다.
환자의 상태를 진찰한 영철은 척추관절증으로 진단하고 입원수속을 끝내였다.
헌데 웬일인지 그 환자는 처음 찾아올 때와는 달리 얼굴에 짙은 그늘이 깔려있었다.며칠이 지나도록 환자의 얼굴에서 웃음 한번 찾을수 없었다.이것은 치료에도 영향을 미치였다.
영철은 구역병원의사로 오래동안 일해온 과장 김계화를 찾아갔다.그를 통해 녀인의 치료정형에 대하여 료해한 과장은 물었다.
《영철선생은 치료에서 차도가 없는 원인이 무엇인것같아요?》
《환자와 의사가 호흡을 맞추어야 하겠는데 그의 기분상태가 좀처럼 달라지지 않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과장은 《각이한 환자들이 많이 찾아오는 구역병원에서 치료사업을 하자니 힘들지요?》 하며 말을 이었다.
《환자들은 자기가 앓고있는 병에 대하여 늘 생각하지요.특히 몸이 매우 불편하거나 난치의 병으로 진단받으면 생각이 더욱더 복잡해지군 한답니다.그럴 때 우리 의사들이 환자들의 심리를 잘 알고 그에 맞는 전술을 활용할줄 알아야 치료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답니다.》
일찌기
난치성질병을 치료하는 의료일군일수록 더 뜨거운 정성으로 환자들과의 사업을 잘해야 한다는 당의 뜻을 가슴에 새길수록 영철은 머리가 숙어졌다.환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볼줄 아는 의사의 실력은 결코 학력이나 지식에 있는것이 아니였다.
다음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영철은 환자와 마주앉았다.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질병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려주는 선전자가 되여 병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여러 장기와의 호상관계, 병상태와 앞으로의 치료대책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마침내 환자는 병을 고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치료에 림하기 시작했다.
영철은 또다시 신심을 안고 치료사업에 달라붙었다.
그는 이 녀인만이 아니라 찾아온 모든 환자들과 질병과 관련한 상담을 진행하였다.서로 물어보고 대답을 찾는 과정에 영철은 환자들의 심리를 파악하였고 몸상태와 치료과정을 놓고 의학적으로, 통속적으로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어 그들이 치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도록 하였다.
치료사업의 첫시작을 상담으로부터 시작하는 그의 모습에서 환자들은 친근감을 느끼였다.하여 그들은 짬만 생기면 영철의 치료실에 찾아와 알고싶은것을 묻군 하였다.
그때마다 영철은 아는껏 설명해주기도 하고 모르는것은 밤을 새워가며 의학도서를 탐독하여 환자들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
그러자니 그에게는 많은 의학과학기술서적들이 필요하였다.
어느날 초급당비서 박광숙이 두툼한 자료집을 안고 그의 치료실을 찾았다.
《출장길에서 가져온 자료들인데 선생의 치료사업에 도움이 되겠는지.》
고마움의 눈빛을 보내며 자료집을 펼치던 영철은 마침이라는듯 손을 저었다.
《환자들이 이 질병에 대해 물어보길래 미래원에 들려보려던 참이였습니다.》
이런 그를 정깊은 눈길로 바라보던 책임일군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영철선생, 난 선생이 의학도서집필사업에도 앞장섰으면 합니다.》
순간 영철은 속이 뜨끔하였다.요전날 도서집필에 대해 말하는 과장에게 제 이름을 내는 일같다면서 그만두겠다고 하였던것이다.
그의 속마음을 읽은듯 초급당비서는 자기의 의학지식과 기술, 경험을 과학적으로 립증하여 글로 남기는 사업이 결코 누구의 이름을 내는 일이 아니다, 인민의 생명을 가장 귀중히 여기는 어머니당의 숭고한 뜻을 더 잘 받드는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는 사업이라는데 대하여 깨우쳐주었다.
그날 저녁 영철은 자기의 미완성원고를 펼쳐들었다.의료일군의 본분에 대하여 다시금 새겨보는 그의 가슴속에서는 인민의 건강증진을 위한 일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을 열정이 끓고있었다.
몇달후 당조직의 믿음과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영철은 끝내 도서 《다리아픔을 일으키는 질병》을 내놓게 되였다.도서에서 그는 자기의 땀이 깃든 조기대퇴골두무균성괴사와 관절질병치료에 좋은 침칼료법을 소개하였다.
우리 의사선생님이 좋은 도서를 집필하였다고 제일처럼 기뻐하는 환자들을 보며 그는 자기의 선택을 긍지롭게 여기였다.
추억에 잠겼던 영철은 또다시 로인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우리 의사선생님 하고 조용히 불러볼수록 영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설사 해를 넘긴다고 해도 로인의 치료를 절대로 포기할수 없음을 느끼였다.…
지난 9월 사람들은 공원에서 춤을 추는 76살 난 박산옥로인을 보게 되였다.
좋은 세월을 노래하며 춤가락을 펼치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할머니, 이젠 다리가 아프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물음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요.우리 의사선생님덕분에 난 청춘을 되찾았습니다.》
《우리 의사선생님》,
김영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 부름이야말로 그의 남다른 선택이 가져다준 긍지높은 칭호였다.
본사기자 김옥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