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8. 《로동신문》 6면
제2차 세계대전시기 쏘련은 나치스도이췰란드를 타승하고 인류를 전쟁의 참화속에서 구원하는데 거대한 기여를 하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쏘련과 서방나라들사이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였으며 세계정치구도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쏘련과 서방사이의 정치, 경제, 군사적모순이 격화된 결과이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는 쏘, 미, 영 등 나라들이 다같이 파시즘의 위협에 직면하였기때문에 적을 타승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있었으나 전후에는 전시에 맺었던 반파쑈동맹의 기초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였다.
더우기 사회제도와 리념상차이로 하여 전후 쏘련과 서방나라들사이에는 적대감정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쳐칠은 미국방문기간에 한 대학에서 연설하면서 발뜨해의 슈체찐으로부터 아드리아해변의 뜨리에스떼까지 유럽대륙을 갈라놓는 《철의 장막》이 이미 내리워졌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악명높은 《철의 장막》연설이다.
이보다 앞서 1942년 2월 쓰딸린은 《자본주의국가발전의 불균형성은 일정한 기간을 거치면 세계자본주의체계내부균형의 심한 파괴를 가져오게 되는바 충분한 원료와 소비시장이 없다는것을 인정하고있는 자본주의국가들은 무력으로 현 상태를 개변하며 자기에게 유리하게 세력범위를 다시 분할할것을 기도한다.》라고 지적하였다.
1948년 3월 쓰딸린은 쳐칠의 연설과 관련하여 신문 《쁘라우다》 기자와 한 담화에서 쳐칠의 연설의 목적은 련합군진영속에 불신의 씨를 뿌리기 위한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정에 유독 벼락치부를 하고 전후 세계제국주의의 우두머리가 되여 세계제패를 꿈꾸는 미제에게 있어서 방해로 된것은 쏘련이였다.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1947년 3월 미국회 량원총회에서 《동유럽에서 진척되는 쏘련의 지배에 대한 위구감을 배경으로 미국이 공산주의에 위협당하는 나라들의 내정에 개입할 권리를 가지고있다.》라고 하면서 동서대결을 공공연히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대전당시의 련합국진영은 분렬되고 쏘련과 서방사이의 40여년간에 걸치는 랭전이 시작되였다.결국 불상용적인 두 사회제도와 리념, 미, 영 등 제국주의자들의 악의에 찬 도전이 쏘련과 서방나라들사이의 관계를 파렬에로 이끈 주요원인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동유럽민주주의국가들의 출현도 쏘련과 서방사이의 관계를 긴장하게 만든 요인의 하나로 되였다.
서방나라들은 동유럽에서 쏘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데 대하여 매우 우려하였다.
1946년 미국의 대외정책설계가 죠지 케난은 한 론문에서 대쏘봉쇄정책을 제기하였다.그중에는 동유럽에서 민족주의를 선동하고 쏘련과 동유럽에 대한 경제《원조》를 통하여 이 지역에 침투할데 대한 문제가 포함되여있었다.
미국은 《마샬안》에 쏘련과 동유럽나라들이 참가하도록 제의하였으나 쏘련은 거절하였다.그후 1949년에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나왔다.그에 대항하기 위하여 1955년에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의 군사정치동맹인 와르샤와조약기구가 출현하였다.
1949년에 쏘련과 동유럽나라들은 경제호상원조리사회를 내왔으며 1958년에 서유럽에는 유럽경제공동체가 생겨났다.
이렇게 되여 동서유럽이 두 쁠럭으로 갈라져 전면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였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