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0. 《로동신문》 3면
《금강산가극단과 지방가무단들은
최근 일본각지에서 《걸어온 길 50년, 걸어갈 길 100년》이라는 주제로 총련 금강산가극단결성 50돐 기념공연 《길》이 진행되고있다.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 주제가의 선률이 은은히 울려퍼지는 속에 막이 오르면 장새납독주 《세상에 부럼없어라》, 녀성중창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 무용 《꽃등놀이》, 《씨름춤》 등의 작품들이 펼쳐진다.지금까지 금강산가극단이 진행한 공연들에서 제일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다.
아름답고 고상한 주체예술의 향취를 한껏 느낄수 있게 해주는 예술단체, 여전히 황홀한 일등급의 예술단이라는 절찬을 받는 동포예술인들의 눈앞에 절세위인들의 손길아래 세계해외교포예술의 본보기를 창조하여오던 격동적인 나날이 어리여온다.추억의 파도가 물결쳐오고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인 1974년 4월초 한척의 대형화객선이 동해의 푸른 물결을 헤가르고있었다.
조국인민들은 친혈육의 정으로 이역의 한식솔들을 얼싸안았다.
마침내 꿈결에도 바라고바라던 영광의 시각이 왔다.
1974년 4월 14일
공연을 앞두고 그들은 서로서로 약속하였다.무대에서 절대로 울지 말자고.
하지만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열렬한 박수갈채속에 김일순녀성(현재 재일본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고문)이 헌시를 읊었다.
첫 곡목은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이날의 공연에서 홍령월녀성(현재 금강산가극단 고문)은 《끝없는 이 행복 노래부르네》,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 《조국을 노래하네》를 비롯하여 여러곡의 노래를 불러드리는 특전을 지니게 되였다.이역에서 막돌처럼 굴러다니던 자기들에게 애국의 보람찬 삶을 안겨주신
그때의 광경을 홍령월고문은 여전히 눈물속에 추억한다.
한참만에야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사회주의조국의 씩씩한 기상이 어려오는 가요 《천리마선구자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정호월녀성은 한덕수의장이 작사한 가요 《아들자랑 딸자랑》을 엄국지동포와 함께 혼성2중창으로 불렀다.80고령이지만 그는 총련동포들의 락천적인 생활을 형상한 흥겨운 민요풍의 노래가 장내를 들썩이게 하던 그날의 광경, 우렁찬 재청소리를 오늘도 잊지 못한다.
바람세찬 이역에서
이날
저저마다 눈굽을 훔치며 눈부시게 발전하는 주체예술을 배워가고싶은 소원을 아뢰였다.
그러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지난 시기 음악무용소품들에만 출연하였던 그들에게는 대사와 노래, 무용이 동반되고 인물들의 내면심리세계를 깊이있게 펼쳐보여야 하는 가극을 형상한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던것이다.
하지만
총련예술인들은 불같은 맹세를 다지였다.
온 집단이 부글부글 끓었다.
주인공 황석민역을 맡은 류전현동포는 행복한 고민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몹시 사랑하였다.조국노래들을 즐겨부르는것은 물론 가수들의 이름과 그들의 지정곡까지 다 기억할 정도였다.하지만 그는 예술활동을 시작한지 4년밖에 안되였었다.당시 우리의 주체예술이 도달한 성과들이 집약적으로, 종합적으로 반영되여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역을 나이가 23살밖에 안되고 총련 효고조선가무단의 평범한 배우에 불과한 자기가 맡게 되였다는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조국의 큰 극장을 자기들에게 통채로 내주시고 무리한 련습으로 가수들이 성대라도 상할세라 이비인후과 의사까지 보내주신
그 뜨거운 믿음과 사랑에 충정으로 보답할 결의로 총련예술인들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였다.깊은 밤 숙소밖으로 달려나와 망망대해를 관중삼아 날이 밝고 해가 솟도록 노래부른적이 그 얼마였던가.
황석민의 안해역을 수행한 정호월녀성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동작만도 수백번이나 익히였다.우리말 발음을 정확히 하기 위해 안면강직이 올 정도로 련습하였다.
주인공 황석민일가가 당한 불행과 고통, 그것은 나라없던 그 세월 재일동포들도 피눈물나게 겪었던 비극이고 수난이였다.조국을 잃으면 가정도 행복도 없다,
가극전습은 빠른 속도로 진척되였다.결국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무대에 올릴수 있게 되였다.
1974년 6월 27일
재일동포들은 금강의 선남선녀가 되여 돌아온 자기의 아들딸들을 뜨겁게 맞이하였다.
1974년 8월 29일 금강산가극단 결성모임이 진행되였다.동시에 동포상공인들을 중심으로 금강산가극단 전국후원회가 무어졌다.
며칠후에는 도꾜조선문화회관에서 공화국창건 26돐을 경축하여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공연의 막이 올랐다.가극은 관람자들을 커다란 감격과 흥분에 휩싸이게 하였다.불과 3일동안에만도 1만 1 000여명이 공연을 관람하였다.온 일본땅이 《금강산의 노래》열풍으로 끓어번지였다.도꾜의 큰 거리와 주요역두들에는 공연소식을 알리는 광고들이 나붙었다.가극은 이역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던 재일동포들의 가슴마다에 공화국의 해외공민된 끝없는 영예와 자부심, 애국의 마음을 깊이 심어주었다.누구나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는
1955년 6월 재일조선중앙예술단의 명칭을 달고 불과 20명의 단원으로 첫걸음을 떼였던 총련의 청소한 예술집단은 성악, 무용, 관현악부문을 그쯘하게 갖춘 수백명의 대집단으로 애국의 큰걸음을 내짚게 되였다.금강산가극단의 활약으로 총련의 힘은 더욱 강해지게 되였다.
강국의 국기아래 우리 노래 영원하리
하나의 신념, 하나의 의지로 뭉친 애국집단, 이것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세계에 유일무이한 해외교포예술단이라는 평가에 앞서 금강산가극단이 받는 찬사이다.
황금만능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일본땅에서 총련예술인들이 그 어떤 보수와 명예도 바람이 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애국의 한길을 걷고있는것은 절세위인들의 분에 넘치는 사랑과 은덕에 충정으로 보답하려는 마음이 열렬하기때문이다.
1992년 4월
순간 그의 가슴은 격정으로 터질듯하였다.작가대렬에 들어선지 3년밖에 안되는 신인작가가 이토록 크나큰 영광을 받아안았던것이다.
가난한 로동자의 가정에서 태여나 토목공과 철공 등 사회의 최하층에서 헤매이던 전 총련 금강산가극단 배우 엄국지동포는
인민배우 리영수동포에게는 못잊을 추억이 많다.학창시절 륙상선수를 꿈꾸던 그가 예술활동에 나서게 된것은 만수대예술단의 일본공연에서 받은 감동때문이였다.은혜로운 조국의 품은 이역의 한 동포청년의 재능의 싹이 풍만한 열매를 맺게 해주었다.리영수동포가 우수한 가수인 동시에 《아
리영수동포는 2002년
그날
금강산가극단에 대한
총련에 대한
이토록 절세위인들의 크나큰 사랑과 은정속에 금강산가극단의 창작가, 예술인들은 지난 수십년간 각계층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민들을 대상으로 수천회의 공연을 진행할수 있었다.
이 보람찬 나날에 가극단은 영예의
참으로 이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예술인들도 많지만 총련 금강산가극단 예술인들과 같이 행복하고 긍지높은 해외교포예술인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예나지금이나 가극단성원들의 가슴마다에 차넘치고있는 애국의 열기이다.
지난해 2월말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진행된 가극단의 공연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금강산가극단이 이 지역에서 공연한것은 40번이상이지만 그때의 공연은 류달랐다.과정이 순탄치 않았기때문이다.
우리 공화국과 총련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일본반동들은 가극단의 공연을 파탄시키기 위해 갖은 책동을 다하였다.하지만 동포들의 단합된 힘앞에서 그것은 물거품이 되고말았고 마침내 공연이 진행되게 되였다.
녀성독창과 무용 《내 나라의 푸른 하늘》을 비롯하여 무대에 오른 모든 작품들은 장내를 애국의 열기로 세차게 끓어번지게 하였다.
금강산가극단의 무대가 펼쳐지는 곳마다에서 애국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고 동포사회의 단결이 강화되고있다.
이제는 가극단의 구성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대다수가 3세, 4세 동포들이다.
가극단결성 50돐이 되는 올해에 여러명이 이 성스러운 애국대오에 들어섰다.
총련 니시고베조선초급학교시절부터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 장선려청년은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가극단에 들어왔다.그의 어머니도 가극단 무용수출신이다.장선려청년은 지금 조국에 대한 동포들의 절절한 그리움을 펼쳐보이는 군무 《가고파》에서 주역을 맡고있다.그의 꿈은
장선려청년과 함께 가극단에 들어온 강향리청년도 도꾜조선제4초중급학교시절부터 무용을 배웠다.우아한 우리 조선무용을 배우면서 조국을 더 잘 알게 되였다고 한다.역시 조선대학교 졸업생이다.그는 올해 여러 공연에 출연하여 관중의 열렬한 절찬을 받으면서 총련의 예술인된 자부심을 깊이 간직하게 되였다고 말한다.
애국의 대는 변함없이 굳건히 이어지고있다.
《우리들의 인생은 절세위인들의 따뜻한 손길을 떠나서 결코 생각할수 없습니다.
본사기자 허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