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6. 《로동신문》 4면
한생토록 한모습으로
올해 나이가 80살인 로력영웅이며 공훈과학자, 교수, 박사인 인민대학습당 강사 김병숙녀성은 두 아들을 조선인민군 군관으로, 교육자, 과학자로 훌륭히 키워 내세운 어머니이며 50여년간 교단을 지켜오는 속에서도 나라의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연구과제를 스스로 맡아 해제낀 공로있는 과학자이다.
앓는 시부모를 모시였던 며느리로서, 교육자의 안해, 두 자식의 어머니로서 가정과 사회앞에 지닌 의무를 다한다는것이 말처럼 쉬운것이 아니였다.낮에는 인민대학습당의 강의실에서 청강생들을 위한 강의를 하고 밤에는 집에 들어가 가정일을 하느라 어느 하루도 그의 손은 마를새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것을 녀성으로서, 교육자로서 응당 해야 할 임무로 여기고 그 어떤 고생도 이겨냈다.때로 전국각지의 공장, 기업소들을 찾아가 제기되는 기술적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오래동안 집을 떠나 생활해야 했고 청강자들이 제기하는 수많은 질문에 해당한 최신기술자료들을 보내주느라 밤을 새워가며 100여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그 나날 그에게 있어서 제일 안타까운것은 시간이 모자라는것이였다.
하지만 그렇듯 남모르는 고생도 달게 여기며 그는 대형산소분리기제작과 우리 식의 먼적외선가열기술확립을 비롯하여 스스로 맡아안은 연구과제들을 완성하여 나라에 적지 않은 리익을 주었다.더우기 사람들을 감동시키는것은 헌신의 그 모습이 홍안의 시절이나 80나이에 이른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것이다.
이런 그를 당에서는 영광의 단상에 거듭 내세워주었다.
본사기자 강금성
변함없이 이어가는 순회길
사리원방직공장 5직포직장 직포공 김영심동무는 30여년세월 충성의 순회길, 애국의 순회길을 걷고있다.
그 나날에는 결코 기쁜 날만 있은것이 아니였다.그는 지금도 고난의 시기를 잊지 못해하며 자주 추억한다.
그때 한공장에서 일하는 수리공총각과 가정을 이루고 어머니가 된지 얼마 안되였던 그는 생활상어려움을 적지 않게 겪었다.
녀성은 우선 가정을 돌봐야 한다며 하나둘 공장을 떠나가는 동무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속아픔을 홀로 이겨내며 꿋꿋이 일터를 지킬수 있게 한것은 무엇이였던가.
그것은 바로 나라가 있어야 가정의 행복도, 자식들의 미래도 있으며 자기 일터를 성실하게 지키는것이 곧 나라를 받들고 부강하게 하는데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숭고한 자각 그리고 후날 자식들앞에서 이 어머니는 저 혼자 잘살겠다고 조국이 겪는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말할수 있게 나라를 위한 길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가려는 불같은 의지였다.
이런 마음을 안고 그는 한해에 2년분, 3년분계획을 완수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신입공들의 기술기능을 높여주는 일도 스스로 맡아하여 공장의 대를 이을 기능공들도 수십명이나 키워냈다.
한m의 천이라도 더 짜려는 마음으로 기대사이를 날렵하게 누벼나가던 젊은 시절처럼 왕성한 일욕심으로 순회길을 이어가는 공훈방직공 김영심동무를 공장일군들과 종업원들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한다.
본사기자
수십명의 아이들을 맡아안고
경흥군 귀락농장 농장원 김선녀동무는 사회주의애국공로자이다.
온 농장이 자랑하는 실농군인 그는 처녀시절부터 20명의 부모잃은 아이들을 맡아키운 쉽지 않은 녀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그 많은 자식들만 돌보자고 해도 힘든데 농장일을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사실 많은 자식을 키우면서 농사일을 한다는것은 정말 힘에 부친 일이였다.
끼니때마다 식사를 준비하자고 하여도 가마를 여러번 갈아야 했고 어느 하루도 빨래감이 없는 날이 없었다.그러느라니 늘 그리운것이 잠이였다.그래서 김선녀동무자신도 저도 모르게 일을 그만두고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하지만 그는 인차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부모잃은 아이들을 맡아키운것은 나라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고싶은 생각에서였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을 개인의 리기와 편안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나라를 위하는 진심이 아니다.
그는 아이들도 잘 키우고 농사도 잘 지으리라 마음다지며 더 억척스럽게 일하였다.후날에는 다 자라 농장에 진출한 자식들과 함께 가족분조를 뭇고 농장적으로 제일 척박한 땅을 맡아나섰다.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지 먹여주고 입혀주는것만으로 어머니의 본분을 다한다고 말할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자식들을 나라를 위하여 자기를 바칠줄 아는 참된 인간으로 키울 때 진정 어머니구실을 다했다고 말할수 있다는것을 잘 알고있기에 김선녀동무는 저수확지를 맡아 자식들과 함께 아글타글 걸구었고 거기서 생산한 많은 알곡을 나라에 바치는 소행도 발휘할수 있었다.
오늘도 김선녀동무는 자식들의 삶의 거울, 본보기가 되여 포전을 가꾸고있다.
본사기자 김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