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9. 《로동신문》 4면
《녀성들은 국가사회발전의 힘있는 력량이며 녀성들의 역할을 떠나서 가정과 사회, 나아가서 조국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습니다.》
이 나라 어머니들의 평범한 삶을 숭고한 모성애의 정화로 값높이 빛내여주시는
조국앞에, 자식들앞에 언제나 떳떳하기 위하여 그 어떤 고생도 락으로 삼고 살아온 정의롭고 강직한 공산주의어머니들,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의 모습은 과연 무엇으로 하여 그토록 아름다운가.보석같은 애국지심으로 고결한 그들의 값높은 삶에서 우리가 배우는 애국과 인생의 참뜻은 무엇인가.
최옥애녀성
동대원구역 문신1동 86인민반에서 살고있는 최옥애녀성은 두 아들을 영웅으로 키운 훌륭한 녀성이다.
그의 맏아들은 38살에 평양도시계획설계연구소 설계가로 일하면서 묘향산등산도로설계를 훌륭히 완성하여
자식들중 한명이 영웅으로 되여도 어머니는 사회앞에 더없이 긍지스럽고 떳떳할것이다.하물며 두 아들이 영웅인 그의 보람과 행복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하다면 최옥애녀성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여 사회와 집단앞에 지닌 의무를 그처럼 책임적으로 성실히 수행한 훌륭한 영웅으로 성장할수 있었는가.
최옥애녀성은 자식들이 어려서부터 건전한 정신도덕적풍모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각별히 마음을 썼다.그는 부부간에도 늘 자기가 먼저 양보하며 집안에 언제나 따뜻한 정이 흐르게 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자식들이 견학을 가는 날에도 소박한 살림이지만 정성이 깃든 별식을 가방에 넣어주며 동무들과 꼭 나누어먹으라고 각근히 당부하군 하였다.
언제인가 맏아들이 집이 먼곳에 있는 학급동무를 데리고와서 자기의 점심밥을 함께 나누어먹은적이 있었다.저녁에 퇴근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된 최옥애녀성은 아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정말 용타고, 자신보다 먼저 동무들을 위할줄 알아야 앞으로 큰일을 할수 있다고 칭찬해주었다.그는 이렇게 자식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인정미, 긍정의 싹을 심어주고 적극 자래워주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자신의 실천적모범으로 당과 국가의 은덕에 어떻게 한생을 바쳐 보답해야 하는가를 자식들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주었다.
최옥애녀성은 한생토록 설계원으로 일했다.집에 돌아와서도 자기들의 잠자리까지 다 펴주고는 탁상등앞에서 다시 설계도면을 펼치군 하던 어머니, 같은 설계원으로 일하던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대장이 된 둘째아들이 중대를 병사들의 정든 집으로 꾸리기 위해 여러가지 일판을 벌려놓았을 때 최옥애녀성은 아들이 보내온 종합축사와 양어장설계도면들을 깐깐히 살펴보며 아낌없는 방조를 주었다.뜻밖의 일로 부상을 당한 아들이 더는 군사복무를 할수 없다는 의학적결론을 받았을 때에도 그는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아들에게
최옥애녀성의 모습은 우리의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어떻게 교양해야 하며 시대앞에 지닌 자기의 사명과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금 깨우쳐주고있다.
한생토록 자식들을 위해 고심하면서도 견실하고 대바르게 조국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들의 실천적모범으로 후대들에게 애국적삶의 본보기를 마련해준 여기에 우리 당이 값높이 내세워준 공산주의어머니들의 참인간상, 고결한 풍모가 비껴있는것이다.
본사기자 조경철
최정순녀성
평안남도 순천시 련봉동에서 살고있는 최정순녀성은 딸자식 5명을 모두 조국보위초소에 세운 쉽지 않은 녀성이다.그는 자식들이 군사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그들에 대한 교양을 일상적으로 진행하여 그들모두를 혁신자로, 녀맹초급일군으로 키웠다.
사실 그의 딸들은 처녀시절부터 모든 면에서 앞장섰던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했다.그래서 그의 가슴속에는 딸들을 학자로, 가수로 키워 남부럽지 않게 내세우려는 소중한 꿈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는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지켜주시기 위해 1995년의 첫아침 다박솔초소를 찾으신
하여 그는 자식들의 첫 일과를
그 나날 몸도 마음도 몰라보게 성장한 그의 딸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초소로 떠나갔다.늘어나는 입대증과 더불어, 자식들이 군사복무를 잘하고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그의 가정은 총대가정으로 불리웠고 그는 거기서 더없는 만족을 느끼고있었다.
세월은 흘러 혁명의 군복을 입고 초소로 떠났던 자식들도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그 나날 맡은 일을 책임적으로 수행하면서도 오랜 세월 원군길을 변함없이 걸어온 최정순녀성의 머리에도 흰서리가 내리였다.
자식들이 남부럽지 않게 어엿이 성장하였지만 그는 자식들에 대한 교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언제인가 제대되여 일터에 섰던 셋째딸이 그에게 삼촌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동생들도 아직 조국보위초소에 서있는데 자기 하나쯤 집살림을 돌본다고 무슨 큰일이 나겠는가고, 자기는 직장에 나가지 않고 늘 일손이 바쁜 어머니를 도와 앓는
그 순간 최정순녀성은 다 자랐다고 하여 자식들의 속마음을 언제나 깊이있게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파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언제부터 당과 국가의 은덕속에 사는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는 생각이 싹트게 되였는가.나라에서는 우리가 렬사가족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랑과 은정을 돌려주었는가.남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기때문에 우리는 응당 남들보다 더 힘껏 일해야 한다.
그렇게 그는 셋째딸의 마음을 돌려세워 일터로 떠밀었다.그리고 자신부터가 자식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년로보장을 받은 후에도 나라의 부강번영에 보탬을 주는 좋은 일들을 적극 찾아하면서 자기가 걷는 원군길에 자식들도 세웠다.뿐만아니라 가정을 이룬 자식들이지만 우정 시간을 내여서라도 자주 그들의 집을 찾아가 혁명의 피줄기를 꿋꿋이 이어가도록 이끌어주었다.
그의 손길에 떠받들려 자식들의 마음속에는 나라를 위한 마음이 더 깊이 자리잡게 되였다.
그 나날을 회상하며 최정순녀성은 시간의 흐름속에 사람의 육체는 로쇠될수 있어도 자식들을 바른길로 이끌어주는 어머니의 마음은 로쇠를 몰라야 한다고 절절히 이야기했다.
나라에서는 맡은 혁명과업을 책임적으로 수행하면서도 자식모두를 인민군대에 내보내고 20여년세월 원군길을 걸어온 그를 모범로동자영예상수상자로, 제4차, 제5차 전국어머니대회 대표로, 온 나라가 다 아는 공산주의어머니로 값높이 내세워주었다.
본사기자 김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