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월요일  
로동신문
공산주의어머니영예상수상자들

2024.11.25. 《로동신문》 4면


유영희녀성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녀성들이 없으면 가정도 사회도 나아가서 조국의 미래도 있을수 없습니다.》

길주군 홍수리에서 살고있는 유영희녀성은 오늘도 34년전의 《로동신문》을 소중히 간직하고있다.뜻하지 않은 일로 화상을 입은 한 병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수백명의 전우들이 자기의 살점을 떼여내고 수십명이 피를 바치였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열렬한 전우애, 동지애로 하여 이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난 어제날의 병사, 그는 유영희녀성의 남편인 영예군인 김길룡동무이다.

유영희녀성이 시집문턱을 넘어섰을 때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보여준것도 다름아닌 그 신문이였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왜서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다른것도 아닌 그 신문을 먼저 안겨주었는지 다는 알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후였다.좀해서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남편이 문득 벼짚을 가져다 새끼를 꼬는것이였다.의아해하는 그에게 남편은 농장에 필요한것이라고, 제대되여 고향에 온 후부터 새끼줄을 농장에 보내주군 했는데 농장원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것이였다.

과묵한 성격인 남편의 얼굴에 웃음이 피는것을 보니 그도 기쁘기 그지없었다.남편의 일손을 도우며 그는 결심했다.남편이 농장을 위한 좋은 일을 찾아하면서 혁명의 꽃을 계속 피우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깡그리 바쳐가겠다고.

그때부터 그는 남편과 함께 농장을 위한 일을 스스로 찾아하기 시작했다.농사에 필요한 영농물자를 마련하여 보내주기도 했고 작업반탁아소에 보육원이 부족하다는것을 알고는 편제없는 보육원이 되여 동네아이들을 돌보기도 했다.남편이 신탑리 약초분조의 명예농장원이 되였을 때에도 있는 힘껏 도와나섰다.

그길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심한 화상의 후과로 한여름에도 추위를 타는 남편, 혼자서는 귀여운 자식도 업어주지 못하는 남편이 힘겹게 일손을 놀릴 때면 그는 남몰래 눈물을 머금군 했다.하지만 그는 애국의 땀을 바치는데서 더없는 기쁨과 행복을 찾는 남편의 모습에서 힘을 얻으며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맡아나섰다.동네사람들이 영예군인집에서 그런 일을 안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고 하며 만류할 때에도 그는 남편과 함께 변함없이 나라를 위한 좋은 일을 찾아했다.

그후 그는 세 자식의 어머니가 되였으며 자식들을 대바르게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어려서부터 자식들이 만경대혁명사적지와 금수산기념궁전(당시) 수목원에 백도라지를 정성껏 심으며 충성과 애국의 마음을 자래우도록 하였고 학교와 마을에서 영예군인집의 자식들이라고 하여 남달리 생각해줄수록 언제나 좋은것은 남에게 양보하고 례절이 밝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머니의 훌륭한 교양속에 자식들은 대바르게 성장하였으며 중학교를 졸업하고 혁명의 군복을 입었다.

영예군인의 안해로서, 세 자식의 어머니로서 그가 따로 맡은 사회적분공은 없다.하지만 그는 자기 가정에 돌려준 나라의 은덕을 가슴깊이 새겨안고 나라를 위해, 농장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데서 제일 큰 행복과 기쁨을 찾으며 그 어떤 평가나 특혜도 바람이 없이 지난 30여년을 묵묵히 살아왔다.

나라에서는 이런 숭고한 인생관을 지닌 그를 공산주의어머니로 내세워주었다.

본사기자 김일경

 

황태윤녀성

 

사회앞에 지닌 본분을 다하는 어머니만이 자식들을 훌륭히 키울수 있다.

육체적생명보다 정치적생명이 더 귀중하며 누리는 삶보다 바치는 삶이 더 값있다는것을 자신의 실천적모범으로 가르쳐주는 어머니들의 모습에서 자식들은 인생과 애국의 참뜻을 깨달으며 성장한다.

공산주의어머니영예상을 수여받은 선교구역 등메1동에서 살고있는 황태윤녀성이 바로 그렇게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는 한생을 후대교육사업에 바쳐왔다.또한 군인가족으로서 병사들의 어머니로 살아왔다.

어린시절에 자식들의 눈에 비낀 그의 모습은 학생들을 살붙이처럼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불같은 정열과 노력을 기울이는 성실한 교육자의 모습이였다.

그가 부어주는 친혈육의 사랑속에 훌륭하게 성장한 제자들은 그 얼마였던가.학생들에게 더 좋은 참고서를 구해주기 위해 수십리길을 달려가기도 했고 남보다 몸이 약한 제자를 위해서는 아침마다 닭알이나 오리알을 삶아가지고 나와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주군 하였다.학생들을 가르치다 밤이 깊으면 그들을 집앞에까지 데려다주고서야 발길을 돌리군 하였다.

방학이면 황태윤녀성의 집은 교실이나 다름없이 되여버리군 하였다.살림방에 한구들 들어앉은 학생들때문에 그의 자식들은 때로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안되였다.그러나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그들에게 밥과 국을 끓여주며 미소를 짓군 했다.

황태윤녀성이 온갖 정을 기울인 사람들은 비단 제자들만이 아니였다.그는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작업복을 갈아입고 터밭에 나가 남새를 가꾸었으며 마당이 좁다하게 꾸려진 집짐승우리들을 청소했다.후대교육사업으로 바쁜 선생님이 어떻게 집짐승까지 기르겠는가고 사람들이 만류할 때마다 그는 나야 군인가족이 아닌가고, 학생들뿐 아니라 병사들을 친혈육처럼 돌보는것도 내가 스스로 받아안은 당적분공이라고 흔연히 말해주군 하였다.

사회앞에 지닌 의무에 항상 성실하고 대바르며 량심적인 어머니의 모습은 자식들의 가슴속에 한생의 거울로 새겨져 그들을 참다운 삶의 길로 이끌어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 그의 자식들은 어머니처럼 충성과 의리에 살고 정과 헌신으로 동지들을 위해주며 실력과 실적으로 나라를 받들어갈 일념을 안고 아글타글 노력하였다.그 나날에 맏아들과 딸은 어엿한 일군으로 성장하였으며 둘째아들은 나라의 국력강화에 적극 이바지한 공로로 로력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년로보장나이가 지났지만 황태윤녀성의 모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그는 늘 수수한 작업복차림으로 터밭에서 남새를 가꾸고 부지런히 집짐승을 길러 초소의 병사들에게 보내주었다.항상 수수한 옷을 입고다니는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새옷을 마련해주면 그는 정히 보관하고있다가 군사복무를 마치고 돌아왔거나 시집장가를 가는 제자들에게 들려주군 하였다.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제자들이 어째서 그를 그처럼 따르는가를 잘 알수 있었다.

황태윤녀성의 사랑이 자기 가정만을 위한것이였다면, 그의 헌신이 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자식들이 오늘처럼 성장하지 못했을것이다.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훌륭한 자식의 뒤에는 언제나 대바르고 강직한 어머니가 있다는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 어머니들이 실천적모범으로 자식들에게 혁명적영향을 주고 참된 삶의 길로 이끌어줄 때 당의 결심을 실천으로 받들고 조국의 부강번영을 억척같이 떠미는 이 나라 아들딸들의 발걸음은 순간의 멈춤도 없이 줄기차게 이어질것이다.

본사기자 조경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