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8. 《로동신문》 4면
《애국은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이고 투신입니다.》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조국이 부를 때에는 힘으로, 지식으로, 열정으로 선뜻 호응해나서고 조국이 힘들어할 때에는 스스로 무거운 짐을 걸머지는 진실한 마음이다.
그 고결한 사랑의 감정을 우리는 룡등탄광 김광철청년돌격대 대원 박신혁, 배천군 금해농장 농장원 최은일, 함경북도정보통신국 실장 백철범, 대동강구역 문흥1동 63인민반 리정희동무들의 심정을 통해서도 뜨겁게 느낄수 있었다.
첫발을 용감히 떼게 하는 힘
룡등탄광 김광철청년돌격대 대원 박신혁
사회주의건설의 어렵고 힘든 전구마다에로 달려나가는 청년들을 볼 때면 내가 탄광으로 탄원하던 때가 생각난다.처음 일을 시작할 때까지만 하여도 나의 가슴속에는 이곳 룡등탄전에서 청춘의 꿈과 리상을 활짝 꽃피울 열망이 꽉 차있었다.하지만 정작 힘에 부친 막장일에 부닥치고보니 그 열기는 점차 식어갔다.하루일이 끝나면 온몸이 땅속으로 잦아드는것만 같았고 눈에 설고 손에 설어 계획을 미달하는 날도 드문하여 남몰래 속앓이를 할 때도 있었다.그럴 때면 이길을 끝까지 갈수 있을가 하는 생각이 깊어졌다.
바로 그러한 때 조국은 어머니당의 뜻을 받들어 자립경제발전의 전초기지에 탄원진출한지 2개월밖에 되지 않은 나를 청년절경축행사에 불러주었다.아직은 나라를 위해 별로 크게 한 일도 없는 우리 청년들의 소행을 전시에 화선에로 달려나가 적의 화점앞에 한몸을 서슴없이 내댄것과 같은 영웅적소행이라고 높이 치하해주시고 청년절경축행사에 불러 영광의 기념사진까지 찍어주신
그 믿음에 보답하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동지들의 사심없는 방조속에서 기술기능과 현장경험을 높이기 위한 사업에 사활을 걸고 달라붙었다.그후 혁신자속보판에 내 이름이 처음 나붙었을 때 기쁨과 환희는 이루 말할수 없었다.
탄원길은 결코 훌륭한 자서전이나 청춘시절의 일시적인 흥분때문에 걷는 길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것을, 한생을 깡그리 조국에 바치는 그길이 바로 우리의 탄원길이다.천리길도 한걸음에 시작되듯이 탄원길도 첫발부터 용감하게 뗄줄 알아야 한다.각오와 맹세는 남보다 드높을수 있어도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자면 자기를 이길줄 아는 강한 분발력과 인내력이 필요하다.이것이 진함없는 원동력으로 될 때 애국의 주로에 들어선 첫걸음부터 뚜렷한 삶의 자욱을 남길수 있고 한번 선택한 길을 끝까지, 곧바로 갈수 있다.
어떤것이 사는 멋인가
배천군 금해농장 농장원 최은일
올해 나는 영광스럽게도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니였다.
한때는 침상에 매인 자신을 두고 번민속에 모대기던 내가 당이 안겨준 고귀한 정치적생명을 받아안았을 때 정말 꿈만 같았다.농장일군들도 농장원들도 우리 영예군인다수확자가 당원이 되였다고 제일처럼 기뻐하였다.
몇해전 내가 안해와 함께 저수확지를 맡을것을 결심하였을 때 일군들은 그 몸을 가지고 어떻게 농사를 짓겠는가고, 그러지 말고 치료에만 전심하라고 하면서 만류하였다.그때 나의 귀전에 들려오는 절절한 목소리가 있었다.애국렬사인
팔다리를 부상당하고도 수류탄을 물고 적진속에 뛰여들던 영웅앞에 늘 자신을 세워보거라.선서를 한 군인이 일신상의 불행때문에 조국앞에 지닌 자기의 의무를 포기하는것은 투항이고 변절이다.
나는 변절자가 될수 없었다.
그것은 죽기보다 못한 길이였다.당에서 중시하는 알곡생산을 위해 마지막힘까지 깡그리 바칠 병사의 각오를 안고 나는 안해의 부축을 받으며 결연히 포전으로 나갔다.우리는 그곳에서 살다싶이 하였다.봄내여름내 흘린 구슬땀이 자양분이 되여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풍작이 들었다.알알이 여문 이삭들을 소중히 어루쓸수록 영예군인인 나도 나라의 쌀독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었다는 생각에 새힘이 솟구쳤다.
고마운 당과 조국은 우리부부의 소행을 헤아려 나에게는 사회주의애국공로자의 영예를, 안해에게는 높은 국가수훈을 안겨주었다.
올해에도 우리 포전에는 또다시 풍요한 작황이 펼쳐졌다.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볼수록 이게 바로 사는 멋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은 뿌듯해졌다.
그렇다.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해 크든작든, 그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든 자기의 열과 정을 깡그리 다 바치는 하루하루에 우리 시대 인간들의 사는 멋이 있다.
내가 설 곳에 빈자리를 남긴다면
함경북도정보통신국 실장 백철범
올해초 우리에게 구내망통합관리체계를 구축할 과업이 제기되였을 때였다.이 사업이 우리 단위의 당결정서에 반영된것이라는 자각은 나를 긴장하게 했다.
당조직에서 우리를 믿고 중요한 과업을 맡겨주었는데 경험이 부족한 내가 그 믿음에 보답할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때 분초급당비서동지가 나를 찾아왔다.
이 과업은 반드시 동무들, 젊은 기술자들이 주동이 되여 집행해야 하며 또 얼마든지 할수 있다.룡성의 청년들도 당결정집행에서 청춘의 열정을 남김없이 떨치지 않았는가.더우기 실장동무야
일군의 고무적인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룡성의 청년들은 현장경험이 풍부하여 두몫, 세몫 일감을 해제끼지 않았다.나이나 사업년한을 운운하며 응당 해야 할 과업앞에서도 물러서려 한다면 당결정은 누가 집행하겠는가.내가 설자리에 빈자리를 남길수 없다.
이런 각오를 가지니 아득해보이던 목표도 발밑으로 굽어볼수 있는 신심이 생겼다.그후 우리 실의 젊은 기술자들은 한마음한뜻으로 달라붙어 당결정서에 반영된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였다.
당의 웅대한 구상을 실현하는 길에서 내가 설자리는 하나의 작은 점일수도 있다.그러나 내 만일 그 점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면 거기에 생긴 공백을 무엇으로 메울수 있겠는가.
부강조국건설의 보람찬 투쟁에서 자신이 맡고있는 몫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자각이야말로 수준과 능력, 잠재력의 한계를 초월하게 하는 힘의 원천인것이다.
제일 행복한 때
대동강구역 문흥1동 63인민반 리정희
언제인가 나는 중학시절동창들과 자리를 같이한적이 있었다.
현재 당일군으로 사업하는 한 동창생은 사람들의 성장과정을 볼 때가 제일 기쁘다고 했고 교육자인 동창생은 사회와 집단을 위해 큰 일을 한 제자들의 소식에 접할 때가 제일 즐겁다고 했다.일터와 직무는 달라도 그들 누구나 당과 조국을 위한 길에서 인생의 긍지와 보람을 찾고있었다.문득 군인가족인 나에게는 제일 행복한 때가 언제인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나는 고난의 시기 적막한 산골의 군인가족마을에서 첫 살림을 시작하였다.남편은 늘 부대에 나가 살다싶이 했고 집안의 크고작은 일은 전부 내가 맡아 해야 하였다.
저도 모르게 나약해지던 그때 친혈육처럼 돌봐주던 군관의 안해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주저앉고말았을지도 모른다.그들은 힘들수록 군인가족임을 명심하라고 다정히 일깨워주었다.그때는 그 네 글자의 의미를 다는 알지 못했다.그저 일단 시집을 왔으니 남편을 잘 받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일했다.그런데 몇해후 나는 분에 넘치게도 국가수훈의 영예를 지니였다.그저 병사들을 위해 집짐승을 많이 길러 고기생산을 늘인것밖에 더 한 일이 없는 내가 아닌가.그날 남편은 우리 군인가족들에 대한 당과 조국의 믿음과 사랑을 언제나 잊지 말자고 절절히 말했다.내가 군인가족이라는 그 부름의 무게를 절감하게 된것은 영광스럽게도 조선인민군 제2차 군인가족열성자대회에 참가하였던 10년전 그날이였다.
한 유명한 작가는 녀성이란 비록 이 세상에 마감날이 온다 해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저버리지 못하는것이니 이것이 바로 녀자가 남자와 다른 점이라는 말을 남겼다.하지만 우리 군인가족들의 사랑은 단순히 자기 일생의 반려자에 대한 정만이 아니다.
나는 사랑한다.남편의 군복과 령장우에 빛나는 별을 그리고 군인가족이라는 소중한 그 부름을.
어머니조국을 위해, 우리 군인들을 위해 나의 이 사랑을 사심없이, 아낌없이 바치며 나는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