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23. 《로동신문》 6면
얼마전 우리는 취재길에서 한권의 색바랜 수기집을 마주하게 되였다.
뚜껑에 새겨져있는 이름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라국, 그는 바로 가요 《조선인민군가》, 《나는 알았네》를 비롯한 많은 명곡들을 창작하여 오늘도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이름난 작곡가였다.
뭇사람들속에 재능있는 작곡가로만 알려진 그가 전화의 포연탄우를 헤쳐온 전쟁로병이며 더우기 의용군출신이라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 수기집을 한장두장 펼쳐보게 하였다.
의용군출신의 작곡가, 그는 과연 어떤 인생행로를 거쳐 력사에 남아 후대들에게 두고두고 전해질 명곡들을 창작한것인가.우리는 그에 대한 대답을 색날고 보풀이 인 한권의 수기집에서 찾았다.
《우리의 사회주의조국은 인민들에게 참된 삶과 행복을 안겨주는 진정한 조국입니다.》
라국선생의 수기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 조국해방의 환희가 삼천리강토에 차넘치던 때부터 시작되였다.
《해방의 기쁨은 이름난 음악가가 되려는 나에게 배움의 열망을 더해주었다.하지만 하루하루가 흐를수록 나의 가슴속에는 어두운 그림자만이 서려들었다.학비를 마련하느라 수업을 마치는 길로 역으로 달려나가 짐을 져나르는 힘겨움과 하숙집에서의 랭대, 굶주림과 같은 고통… 그러한것은 얼마든지 이겨낼수 있었으나 또다시 우리 조국땅을 짓밟은 침략자에 의해 배움의 열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탈당한 슬픔과 분노로 하여 나의 가슴은 터지는것만 같았다.…》
당시 라국선생은 서울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고있었던것이다.
가슴저미는 쓰라림으로 몸부림치며 그는 해방의 기쁨속에 대학공부를 하고싶은 생각을 터놓는 자기에게
《미군정이 실시된 이 땅에서 대학공부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대학에서의 생활은 자기의 꿈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어느날 라국선생은 학우들로부터 공화국북반부에서는 평범한 로동자, 농민의 자식들을 위한 종합대학이 일떠서고 모두가 마음껏 배우고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그때부터 그의 마음은
바로 이러한 때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난지 단 3일만에 서울이 해방되고 남조선의 애국적인 청년들속에서 의용군탄원열기가 세차게 고조되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주체39(1950)년 7월 5일부 《로동신문》은 《해방된 공화국남반부청년들 의용군조직에 총궐기》라는 제목밑에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공화국남반부의 해방된 지구에서 자기들의 자유로운 생활을 복구하며 건설하고있는 각지의 애국적근로청년들과 농촌청년들과 남녀학생청년들은 피묻은 미제국주의자들과 리승만역적들을 우리 조국강토에 한놈도 남기지 않고 격멸소탕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를 피로써 쟁취하기 위하여 의용군조직운동에 광범히 일어나고있다.…》
바로 이런 애국적인 청년들속에 라국선생도 있었다.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였다.
전선에 탄원하여 용감히 싸우던 그는 몇달후 당시 조선인민군협주단에 편입되여 싸우는 고지들마다에서 인민군용사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그에 대해 그는 수기에 이렇게 썼다.
《…때로는 날아드는 적의 파편에 악기가 부서지고 몸이 찢기였고 때로는 방금전까지 곁에서 노래부르던 배우가 원쑤의 흉탄에 쓰러지기도 하였다.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적의 포화를 짓누르며 승리의 노래소리를 높이 울렸다.
바로 그길이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배움의 길, 새 조선을 노래하는 음악가가 되려던 꿈을 현실로 앞당기기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기때문이였다.》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조국해방전쟁이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라국선생은 조선인민군협주단 배우로 생활하였으며 그 나날 어느한 나라에서 진행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게 되였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보람찬 삶을 누려온 자기의 생활을 그대로 담은 기악곡을 연주하여 세계각국에서 모여온 축전참가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던 시각 그는 음악가의 꿈을 이룰래야 이룰수 없었던 지난날을 눈물속에 돌이켜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품속에서 비단 음악가의 꿈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혁명가로서 가장 값있는 삶을 받아안게 되리라는것을 그때는 미처 다 알수 없었다.
혈혈단신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여서 부모형제가 못견디게 그리울 때도 있었고 외로울 때도 있었다.그때마다 그의 가슴속에는 바로
그
그 나날 그는
가요 《나는 알았네》의 작곡을 끝마친 날 집에 퇴근해온 라국선생은 자식들앞에서 피아노로 그 곡을 열정적으로 타기 시작하였다.
서정적인 피아노곡이 방안에 울려퍼지자 온 가족이 새로 창작된 노래에 심취되였다.연주를 마친 라국선생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줄 몰랐다.
자식들이 의아히 바라보는데 그가 쓸고 또 쓸어보는 피아노에는 눈물이 점점이 떨어지고있었다.
그 피아노는 얼마전 그에게
그 심정에 대해 그는 수기에 이렇게 썼다.
《어머니라 부르는 나의 조국이
그는 명곡이 창작되여
인간의 참된 삶의 가치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당과 조국의 믿음과 사랑을 떠나 생각할수 없다.
작곡가 라국선생의 수기는 여기에서 끝을 맺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그는 예술영화 《성새》의 주제가창작을 마치고 손에 악보를 쥔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작곡가의 수기는 끝났으나 그를 영광의 단상에 내세워준 은혜로운 품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라국선생의 아들인 의학연구원 종양연구소 실장 라영호동무를 통해서 들을수 있었다.
라국선생이 뜻밖에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신
당의 사랑의 해빛은 라국선생의 자식들의 성장에도 따뜻이 비쳐들었다.
어려서부터
군사복무를 마치고 제대된 그를 당에서는 평양의학대학으로 불러주었고 졸업후에는 소원대로 의학연구원 종양연구소에서 연구사로 일하도록 하여주었다.
30여년세월 연구사로 성실히 일해오던 나날 그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려약재를 리용하여 불치의 병에 효과가 있는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 오늘은 교수, 박사로까지 성장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라영호동무는 어느한 나라에서 진행된 분자종양학과 관련한 국제적인 토론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전후
라영호동무의 아들들도 모두 사회주의조국의 품속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당이 맡겨준 초소에서 보람찬 삶의 자욱자욱을 새겨가고있다.
* *
이제는 세상을 떠난지 수십년이 지난 한 작곡가의 수기가 우리의 가슴을 세차게 울려주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거기에는 그가 창작한 가요 《나는 알았네》와 더불어 후대들에게 영원히 그리고 끝없이 가르쳐주는 진리가 있기때문이다.
수기집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울려나오고있었다.
조국의 품은 곧
본사기자 유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