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1일 토요일  
로동신문
두개의 천리마휘장과 실농군가정

2023.6.8. 《로동신문》 6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농업근로자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당과 뜻을 같이하고 사회주의와 운명을 함께 하면서 농촌의 혁명진지를 굳건히 지키고 쌀로써 당과 혁명을 보위해온 충직하고 애국적인 근로자들입니다.》

평원군 송화농장 농장원인 송영길동무의 가정에는 오랜 세월 정히 보관하고있는 두개의 휘장이 있다.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받은 천리마휘장이다.

《이 천리마휘장들은 우리가 누구들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없이 깨우쳐주고있습니다.》

얼마전 우리와 만난 송영길동무는 이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농장에서 작업반장으로 일을 시작한것은 1960년대초엽이였다고 한다.그때로 말하면 당의 뜻을 높이 받들고 알곡 정보당 500㎏증수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있던 벅찬 시기였다.아버지는 불리한 지대적조건에서도 당에서 바라는대로 높은 수확을 거두자고 아글타글 노력하면서 작업반원들을 이끌어나갔다.

언제인가 작업반의 한 포전이 돌이 많아 밭갈이가 능률이 오르지 않을 때였다.아버지는 여러가지 소극적인 의견들을 다 밀어버리고 밭갈이도 헐하게 하고 수확고도 높일수 있는 적극적인 안을 내놓았다.아예 돌을 말끔히 추어내자는것이였다.아버지는 매일 아침 그 밭으로 오고갔다.며칠후 작업반원들은 어느한 밭에서 돌이 말끔히 없어진것을 보고 저으기 놀랐다.작업반장이 아침마다 한시간씩 돌을 추어냈다는것을 알게 된 작업반원들은 이튿날 아침부터 돌을 추는데 떨쳐나서서 며칠어간에 수백평의 밭을 옥토로 만들었다.남들이 안된다고 하던 비탈밭의 최뚝을 정리해서 적지 않은 밭을 얻어내였고 샘물이 나와 소출이 낮던 논에 물길을 내고 샘물이 빠지게 하여 곡식이 잘되게 한것을 비롯하여 송영길동무의 아버지가 농사를 알심있게 짓기 위해 바친 헌신에 대한 이야기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후 작업반은 천리마작업반의 영예를 지니였다.

《지금도 국가적인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가슴에 단 천리마휘장을 쓸어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송영길동무의 추억깊은 목소리였다.그의 아버지는 나라의 은덕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포전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천리마기수이며 소문난 실농군이였다.송영길동무의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농장을 위하여 일을 더 잘하겠는가 하는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였다고 한다.그러기에 누구도 시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포전에 나갈 때에는 언제나 두엄을 한짐씩 지고나갔고 농장에서 제일 여윈 소를 자진하여 맡아 정성껏 먹이여 한해 여름동안에 제일 살지고 힘쓰는 소로 길러냈다.장마때면 밤에도 자지 않고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서 지고다니면서 동이나 논뚝의 터지려는 곳을 보수했고 바람에 넘어지려는 곡식대를 일으켜세웠다.이제는 년로보장을 받은지도 수십년세월이 흘렀지만 천리마기수의 일솜씨는 여전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에게 생명을 준 혈육인 동시에 참된 농민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깨우쳐준 스승이라고 하면서 송영길동무는 자책어린 어조로 말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한때 전 고향을 뜰 생각을 하였답니다.》

제대를 앞두고 그는 온 가정이 농사를 짓는데 자기 하나쯤은 다른 부문에 가서 일을 해도 되지 않을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부모를 노엽히게 될줄이야…

자식들이 부모의 뒤를 이어 고향땅에 든든히 뿌리내리기를 바랐던것이다.

며칠후 송영길동무는 편지를 받았다.편지에는 농촌청년들이 고향땅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자기의 향토를 사회주의리상촌으로 건설하라는것이 당의 뜻일진대 어떻게 새세대 청년이 자기 고향을 뜰 생각을 하는가라는 엄한 질책과 함께 부디 천리마기수의 아들임을 잊지 말라는 당부가 적혀있었다.

자기를 뉘우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부모의 뜻대로 농장원이 되였다.

전세대가 지녔던 넋이 아무리 고귀한것이라 할지라도 이어지지 않는다면 공허한 울림으로 흩어진다.하지만 그것이 억세게 이어진다면 아름다운 생의 메아리가 되여 끝없이 울려퍼지게 된다.

송영길동무는 부모의 넋이 어리고 땀이 슴배인 포전을 가꾸어나갔다.땅을 기름지게 걸구기 위해 소석회와 흙보산비료 등을 마련해가며 아글타글 노력했다.지쳐 주저앉고싶을 때에도 그는 두개의 천리마휘장을 떠올리며 용기를 가다듬군 하였다.일본새도, 생각하는 품도 어쩌면 송화리의 첫 천리마작업반장이였던 아버지와 꼭같은가고 누구나 찬탄을 금치 못하지만 그는 만족을 모르고있다.

알고보니 그의 안해 역시 실농군이였다.맡은 포전을 알심있게 가꿀뿐 아니라 다른 농장원들의 농사일도 진심으로 도와나서군 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역시 천리마기수의 며느리가 다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뿐이 아니다.년로보장을 받은 송영길동무의 맏누이도 어머니와 함께 농장일을 돕고있으며 현재 농장원인 둘째누이도 나라의 쌀독을 가득 채우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있었다.

진정 그들 한명한명이 천리마휘장에 늘 자신을 비추어보며 량심을 바쳐가고있는 실농군들이였다.

우리에게 송영길동무는 말했다.

《천리마기수였던 아버지, 어머니처럼 저도 나라의 쌀독을 가득 채우는 실농군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그만이 아닌 형제들모두의 한결같은 심정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태워주신 천리마를 타고 사회주의의 만년초석을 반석같이 다지던 아버지, 어머니들의 모습과 투쟁기풍은 결코 지나간 력사의 추억만이 아니다.

전세대가 지녔던 넋을 피줄기로 굳건히 이어가는 새세대들에 의해 이 땅에는 천리마의 력사가 계속 흐르고있다는것을 우리는 한 실농군가정에 대한 취재길에서 다시금 절감하였다.

본사기자 신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