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19. 《로동신문》 3면
계응상선생은 1893년 12월 정주시의 어느한 빈농가에서 태여났다.어려서부터 남달리 향학열이 높았던 그는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이악하게 공부하였다.그때 그의 가슴을 제일 아프게 한것은 세계적으로 력사가 오랜 우리 나라의 잠업이 농촌초가집의 골방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있는것이였다.하기에 그는 우리의 잠업을 일으켜세울 포부를 안고 고향을 떠났다.누에며 뽕밭을 찾아 조선팔도는 물론 현해탄을 건너 고달픈 탐구의 길을 이어갔지만 가는 곳마다에서 모진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이역땅에서 고학으로 대학도 나오고 또 많은 론문도 발표하였지만 그것은 식민지노예의 설음을 가셔줄수 없었다.
그러던 계응상선생이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참된 과학자로서 첫걸음을 내디딘것은 해방후부터였다.
그후 그는 새 누에품종을 얻어내기 위해 연구사업을 더욱 심화시켜나갔고 지난 시기 뽕누에 하나에만 치중하던 자기의 연구사업에 가둑누에, 피마주누에까지 포함시켜 그 범위를 더 확대시키였다.
특히 그는 수백년동안 피마주누에를 쳐오는 나라들에서도 해결하지 못하고있던 피마주누에의 겨울나이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여 끝끝내 이전의것과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세계잠학계에서 처음으로 되는 귀중한 연구성과를 이룩할수 있었다.
나라의 생사존망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 한 과학자의 신변이 걱정되여 일군들을 보내주시고 마음놓고 연구사업을 계속할수 있는 조건도 보장하도록 해주신
그는 자기의 과학적신념과 실험자료에 기초하여 생물학발전과 농업생산실천에 저애를 주고있던 《혼합유전설》과 《환경유전설》을 반대배격하고 유전자설을 옹호고수함으로써 유전학과 생물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그는
하기에 그는 한생을 바쳐 유전학과 육종학분야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는 세계적인 연구성과들을 이룩하였으며 그것을 리용하여 우리 나라의 기후풍토에 맞으며 생산성이 높고 병에도 잘 견디는 누에품종들을 수많이 얻어냈다.
또한 우리 나라의 조건에 맞는 합리적인 누에원종생산공급체계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누에치기를 과학화할수 있게 하였다.
그렇듯 한 과학자의 민족적자존심과 과학적신념을 귀중히 여겨 세계적인 유전학자로 내세워주신
그때로부터 세월은 멀리 흘러 세대는 바뀌였어도
안정철